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 - 제임스 길리건
1장 삶과 죽음의 문제
1.공화당이 집권하면 죽음의 전염병이 번진다
각 정당 집권기에 일어난 폭력 치사의 연간 증가분과 감소분을 합산했더니 공화당 대통령 집권기는 1900년부터 2007년까지 인구 10만명당 자살률에서 14.5명의 순누적 증가세를 보였다. 민주당은 정반대로 1913년부터 2000년까지 집권하는 동안 인구 10만명당 자살률에서 13.3명의 순누적 감소세를 보였다. 마찬가지로 공화당 정부 때는 살인율에서 5.4명의 순누적 증가세를 보였고 민주당은 5명의 순누적 감소세를 보였다. 그래서 공화당 때의 폭력 치사 발생률 총증가분은 19.9명(14.5명 더하기 5.4명)이고 민주당 때의 폭력 치사 발생률 총감소분은 18.3명(13.3명 더하기 5명)이었다. 집권당과 자살률, 살인율, (살인과 자살을 합친) 총 폭력 치사의 이런 연관성이 단순히 우연에서 비롯되었을 확률은 1,000분의 1도 안 된다.
2. 오래 집권하면 죽음 곡선이 가팔라진다.
-의학 연구에는 '용량-반응 곡선'이라는 중요한 개념이 있다 가령 하루에 담배를 많이 피우면 피울수록 폐암에 걸릴 가능성이 높아진다. 용량(노출된 물질의 양)이 많아지면 반응도 커지는 것이다 그리고 담배를 오래 피운 사람일수록 폐암에 걸리기 쉽다 .역시 누적 용량이 많아질수록 반응도 더 커지기 때문이다. 이 결과는 흡연은 폐암의 '위험 요인'이라는 가설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유추해보면 우리는 공화당 정부를 폭력 치사를 부르는 위험요인으로 볼 수 있겠는지, 민주당 정부를 보호 요인으로 볼 수 있겠는지 물을 수 있다.
-각 당을 따로 비교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해보았더니 공화당이 오래 집권하면 폭력 치사 발생률의 순증가세는 커졌고 짧게 집권하면 치사 발생률의 순증가세는 작아졌다. 마찬가지로 민주당이 집권할 때는 집권 기간이 길고 짧음에 따라서 폭력 치사 발생률의 순감소세도 커지거나 작아졌다 .
-공화당 행정부는 폭력 치사의 '위험 요인'으로 작용하고 민주당 행정부는 '보호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이 장에서 살펴본 통계는 암시한다.
3. 왜 이 사실을 아무도 몰랐을까?
2장 자살과 살인의 진짜 범인, 불평등
1. 그는 왜 가족을 살해했을까?
-아내와 아이들을 죽이도록 폴을 몰아간 것은 실직 그 자체가 아니었다. 왜 사람이 그 모양이냐는 아내의 비난에 대한 답으로 아내에게 총을 쏘도록 폴을 몰아간 것은 남자로서 자존심을 잃었다는 느낌, 아내의 눈에 자기가 남자 노릇을 못하는 존재로 비친다는 사실에서 느낀 수치심이었다.
2. 불평등이 커지면 살인율 · 자살률이 높아진다.
-빈민가의 실업과 폭력 범죄라는 이중 전염병을 분석한 영향력 있는 연구에서 윌리엄 줄리어스 윌슨은 "무직과 폭력 범죄의 직접적 관계'를 언급한다. 델버트 엘리엇의 연구를 인용하면서 윌슨은 이렇게 지적한다.
"심각하나 폭력범죄에 관여하는 남자의 비율에서 흑인과 백인의 차이를 비교하면 11세 때만 하더라도 거의 같은데 청소년 시기의 후반으로 가면 흑백 비율이 3대2가 되고 이십대 후반에는 거의 4대1로 격차가 벌어진다. 하지만 엘리엇이 직장이 있는 흑인 남자와 백인 남자를 비교했을 때 21세까지는 두 집단이 보이는 폭력 양상에서 의미심장한 차이가 없었다. ... 결국 폭력 행동의 인종별 차이를 만드러내는 주된 원인은.... 실업이다. "
-취업 가능성이 낮은 도시 빈민가의 흑인 청년들이 마약 거래에 빠져들면서 폭력 행위에 가담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전체 실업률이 높고 낮음과는 무관하게 흑인 실업률은 언제나 백인 실업률의 적어도 두 배 수준을 유지했다. 흑인은 '가장 마지막에 채용되고 가장 먼저 해고된다'는 통설이 통계로 입증된 셈이다. 백인 사회보다 흑인 사회에서의 살인율이 더 높은 이유도 그래서 설명이 된다 .
-자살률과 살인율의 변화를 예측하는 사회·경제적 변수는 실업률만이 아니다. 소득 불평등과 폭력 범죄의 관계를 분석한 연구에서 칭치 시에와 메러디스 푸는 이 관계를 파고든 34개 연구를 다시 분석하여 (절대적) 빈곤과 소득 불평등(상대적 빈곤)은 미국뿐 아니라 세계 다른 나라에서도 살인과 맺는 연관성이 상당히 높다고 결론지었다.
3장 보수는 경제에 강하고, 진보는 경제에 약한가?
"가진 분들과 더 가진 분들을 이렇게 뵈니 감개무량합니다. 여러분을 엘리트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여러분을 저의 기반이라고 부릅니다." -조지 W. 부시
"실업자가 늘어나면 불평등도 확대된다. 그리고 실업자가 줄어들면 불평등도 감소한다" - 제임스 갤브레이스
1. 왜 불평등이 공화당 때는 커지고 민주당 때는 줄어드는가?
-자본주의를 가장 격력하게 비판한 카를 마르크스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에 자본주의의 으뜸 가는 철학적 옹호자였던 애덤 스미스는 벌써 이 경제 체제의 결함 하나는 수요 공급의 법칙으로 말미암아 실업률이 높은 경제 체제로 운영하는 것이 고용자에게 유리하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야 '노동 비용', 곧 고용자가 사람들이 고용자를 위해서 일하도록 설득하려면 지급해야 하는 임금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이런 체제가 최악으로 치달으면 저마다 느끼는 바가 있고 바라는 바가 있는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그저 사고 팔 수 있는 상품, 고용자가 보기에는 더 비싸거나 덜 비싸다는 차이밖에 없는 상품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피고용자보다 고용자를 옹호하고 또 피고용자보다 고용자한테서 지지를 받는 정당은 실업률을 높이는 효과가 있는 정책을 추구해야 남는 장사가 된다.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의 소득 분배 변화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요인을 딱 하나만 꼽으라면 그것은 민주당 정부와 공화당 정부의 상반된 정책이다. 공화당 정부 때는 저소득층과 중간소득층의 실질 소득 증가가 부유층의 소득 증가율을 크게 밑돌았고 민주당 정부 때 나타난 저소득층과 중간소득층의 소득 증가율과 비교해도 크게 낮았다.
-소득증가에서 나타난 정당 사이의 상당한 격차가 우연 때문에 일어났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런 차이는 그보다는 민주당 정부와 공화당 정부가 역점을 둔 정책의 일관된 차이를 드러낸다.
2. 결정적인 것은 대통령이다.
-공화당 정부 때 폭력 치사 발생률이 올라가고 민주당 정부 때 폭력 치사 발생률이 내려간다는 연관성을 통해서 내가 밝혀낸 통계적 규칙은 의회의 다수당이 어느 정당이냐가 아니라 대통령이 어느 정당이냐와 관련이 있었다.
3. 1퍼센트의 이익 대 99퍼센트의 이익
-민주주의 국가에서 어째서 유권자의 99퍼센트가 전체 인구의 1퍼센트에게 나라 전체 재산의 40퍼센트 이상을 몰아주는 것일까?
-수수께끼는 바로 이것이다. 무슨 수를 썼기에 인구의 1퍼센트를 차지하는 소수의 부자가 인구의 99퍼센트를 차지하는 다수에게 명백히 불리한 쪽으로 돌아가는 체제를 받아들이도록 다수를 설득했단 말인가? 상대적 빈곤을 키우는 정당을 지지하도록 다수 유권자를 설득하기 위해서 공화당이 내놓은 해법은 중하류층과 극빈층을 이간질해서 내 지갑을 얇게 만드는 주범이 상류층(과 상류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초점을 흐리는 것이었다. 겨우 입에 풀칠을 하는 사람들이 입에 풀칠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과 티격태격하는 한, 이 두 집단은 부자들을 상대로,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구를 소수의 최상류층과 절대 다수의 어려운 사람들로 양분하는 사회·경제 체제를 상대로 사움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수를 썼기에 이런 일이 가능할까? 아득히 먼 옛날부터 소수가 다수를 다스리는 수법으로 애용해 온 전략을 갈고 다듬은 것이다. 로마 황제들은 이것을 '분할 정복'이라고 불렀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 방법을 썼을까?
린든 존슨 대통령은 미국 남부 사회와 정치 생리를 일컬어 '버본전략'이라고 불렀는데 그것도 그런 수법의 하나였다. 여기서 버본은 위스키가 아니라 남부의 부유한 백인 지배층을 프랑스 부르봉 왕가에 빗대어 일컫는 말이다. 존슨에 따르면 상류층 백인에게는 남부에서 인종 차별이 지속되는 것이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유리했다. 그래야만 못하는 백인이 더 못사는 흑인 집단을 까보면서 우월감을 느낄 수 있고, 그렇게 우월감을 느껴야만 훨씬 재산이 많고 잘사는 백인에게 질투나 앙심을 품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자처하는 정치 체제에서도 소수의 부자가 이런 '분학 정복' 전략으로 절대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을 지배하고 수탈함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많은 전문가들은 공화당이 36년 동안 정치적으로 풍찬노숙하다가 1969년 정권을 다시 잡을 수 있었던 역사적 원인을 단 하나만 꼽으라면 공화당 보수파가 내건 '남주 전략'(이제는 공화당 주류의 정책을 뜻하게 되었다.)이라고 주저 없이 말하는데, 이 전략은 인종 평등에 맞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사우는 것이 핵심읻. 그 중 몇가지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한 대량 투옥 정책을 시행한다. 닉슨 대통령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언하면서 1970년대 중반 이후로 미국의 수감률은 무려 7배가 늘어났다. 특히 마약법 위반자는 보통 폭력을 휘두르느지도 않으며 흑인이나 백인이나 엇비슷하게 마약법을 어긴다는 연구가 많은데도 육독 흑인만 훨씬 많이 투옥되었다. 대량 투옥이 치안 강화라는 합리적 목표에 기여하지 않음은, 나중에 따로 설명하겠지만 대량 투옥이 폭력을 예방하는 수단으로 불필요하고 비효율적임을 보여주는 증거에도 확인된다. 하지만 이 정책은 사실 다른 불합리한 목표에 쓸모가 있다. 1954년부터 1965년까지 이루어진 시민권 운동의 부분적인 성공이 구타나 인종격리 같은 종래의 강압적 인종 차별 수법을 불법화하여 인종 불평등이 줄어든 상황에서 '백인 우월주의;를 다시 세우는 수단인 것이다 .
2) 참정권 박탁한다 투표권이 있다면 대다수가 민주당을 찍을 흑인 수백만 명을 바로 위에서 설명한 대로 강력범으로 낙인찍어서 대체로 일평생 투표를 못하게 한다. 전에는 '인두세'를 물린다거나 '문맹 테스트'를 보게 해서 흑인의 투표를 막고 백인의 우위를 지켰는데, 이제는 법 때문에 그렇게 못하는 대신 이런 식으로 참정권을 박탈한다.
3) 인종 분리책을 재도입하는 데 목적을 둔 소송을 후원한다 .
4) 인종 평등을 끌어올리는 효과를 낳는 법 제정에 반대한다.
-살인륭 증가가 어떻게 인구의 못사는 99퍼센트를 갈라놓아서 잘사는 1퍼센트한테 유리하게 작용할까? 답은 간단한다. 우리 법이 범죄라고 규정하는 폭력의 대다수는 가난한 사람이 저지르므로, 폭력 범죄가 늘어나면 중상류층과 중하류층에 속하는 사람도 저소득층에게 공포와 분노를 느끼면서 정작 나라 전체의 재산과 소득을 대부분 가로채는 것은 상류층이라는 사실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넘어가는 것이다 .
-우리의 법률 제도가 범죄로 규정하는 폭력의 대부분은 가난한 사람이 저지르지만, 가난한 사람의 대부분은 폭력 범죄 뿐 아니라 그 어떤 범죄도 저지르지 않는다. 그리고 폭력의 피해자는 대부분 가난한 사람이다. 그래서 폭력 범죄가 늘어나면 가난한 사람들도 나뉜다. 다시 말해서 폭력을 휘두르지 않고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과 폭력을 휘두르고 범죄를 저지르면서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소수의 가난하나 사람들(깡패나 마약 판매상 등)로 나뉜다. 도심 빈민가의 우범 지대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은 그래서 세법을 비롯하여 각종 법이 못사는 사람들을 희생시키면서 이미 부자인 사람들의 재산ㅇ르 불려주는 쪽으로 쓰인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못하고 넘어간다. 그들은 폭력을 휘두르는 이웃들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기에도 바쁘다.
- 누구와 누구의 이익이 충돌할까? 첫째는 미국 인구의 1퍼센트를 차지하는 부자들의 경제적 이익과 나머지 99퍼센트의 이익이다. 우리는 경제적 불평등이 커지면 살인과 자실이 늘어남을 안다. 그러나 우리는 경제적 불평등이 커지면 아주 잘사는 사람들에게 이익이 됨도 안다. 불평등의 의미가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 폭력 범죄의 주된 희생자는 못하는 사람이므로, 폭력 범죄가 늘어난다 하더라도 잘사는 사람은 어차피 경비원이 지키는 공동 거주 구역 안에서 살거나 비싼 돈을 주고 사설 경비업체를 고용하므로 별로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충돌하는 이익이 또하나 있으니 바로 정치적 이익이다. 폭력 범죄율이 올라가면 중산층이 저소득층한테 느끼는 거부감과 저소득층이 같은 저소득층한테 느끼는 거부감, 다시 말해서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 다수가 폭력을 휘두르는 소수를 자신에게 가장 직접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존재라고 느끼는 데서 오는 거부감도 커지므로 유권자를 분할 정복하기가 쉬워져서 아주 잘 사는 사람에게는 유리하다.
-가난한 사람은 총을 들고 강도질을 하지만 부자는 펜을 들고 강도질을 한다는 옛말이 딱 들어맞는다.
-투표일에 내리는 비처럼 범죄는 공화당에 유리하다. 범죄가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면 상당수의 미국인은 어김없이 진보적 고나용 정책을 비난하고 보수 성향의 후보로 돌아서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보수 성향의 후보가 한편으로는 자녀를 키우고 공권력을 확립하고 범죄자를 응징하는데 단호한 입장을 내세우기 때문이고 또 한편으로는 흑인을 비롯하여 범죄를 많이 저지르는 못사는 사람들에게 정부가 '거저 주는' 데 반대하기 때문이다. '강경대응'은 도움이 안 되며 범죄를 줄이는 길은 더 정의롭고 기회가 더 균등하게 돌아가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는 정통 진보 진영의 답변은 유권자를 거의 움직이지 못했다. 범죄율이 올라가면 진보주의자들은 거의 언제나 수세에 몰린다.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이 [1984년]에서 '이중화법'이라는 개념으로 그런 사탕발림을 통렬하게 까발렸지만 아직도 거기에 속아 넘어가는 유권자가 부지기수다. 그래서 공화당의 정치적 수사는 높은 범죄율을 부자에게 이익임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고 범죄율을 끌어내리고 싶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전략의 비범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범죄율을 실제로 떨어뜨리는 정책에다 '범죄에 미온적'이라는 낙인을 찍어버리면서 또 하나의 이중 화법을 구사하기 때문읻. 그런 시긍로 '공화당은 치안 문제를 내세워서 한 세대 동안 민주당이 맥을 못 추게 만들었다."고 시드니 블루멘설은 말한다.
-범죄율이 높지 않으면 공화당은 '범좌와의 전쟁', '범죄에 대한 강력한 대응'처럼 단숨에 표를 몰아주는 중요한 정치적 자산을 잃어버릴 것이다.
-공화당이 유권자를 분할 정복하는 데 성공한 것은 바로 공화당이 폭력 범죄를 줄이는데 실패했기 때문이고 범죄율이 올라가서 공화당이 선거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공와당이 번영을 가져오는 데도 빈곤을 줄이는 데도 실패했기 대문이라는 역설을 제대로 짚어내자면, 조지 오웰 같은 사람이 또 한명 있어야 할 판이다. 간단히 말해서 공화당의 전략은 '실패는 성공의 보증 수표'라는 구호로 요약된다. 국민에게 번영과 안전을 안겨주지 못할수록 공화당은 잘 나간다.
4. '범죄와의 전쟁'은 범죄율을 끌어올린다.
-폭력을 막는데 주된 걸림돌이 되는 것은 폭력을 막을 방법을 모르는 무지가 아니라 폭력을 막는 쪽으로 우리 사회를 바꿔야겠다는 정치적 의지의 결여, 다시 말해서 폭력을 일으키는 정책을 끝내려는 의지의 결여다.
-대마초와 헤로인이 폭력을 예방한다는 것은 에누리 없는 사실이다. 대마초와 헤로인의 약물 효과에 바진 사람은 이 약물들에 노출되지 않은 사람보다 덜 폭력적이다. 폭력을 유발한다고 알려진 유일한 약물(알코올)은 합법이고 남용되는 약물 중에서도 가장 중독성이 높고 치명적인 약물(담배)도 합법이다. 그리고 불법 약물하면 자꾸만 폭력이 연상되는 주된 이유도 대마초와 헤로인 때문이 아니라(코카인 때문도 아니라) 사법 체제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 약물들을 불법이라고 선언하는 법 때문이다.
-이런 약물들을 범죄화하는 것이야말로 세계 도처에서 횡행하는 폭력의 주된 원인 가운데 하나다. 1933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미국에서 금주법을 폐기하자 밀주 거래 상들이 사라진 것처럼 이런 약물들이 합법화되면 마약 카르텔들은 하루 아침에 사라질 것이다 .
-우리가 범죄로 치부하는 마약들은 그 자체로는 폭력 행동을 유발하지 않지만 의학적 문제는 일으킬 수 있다. 그렇기 대문에 이것은 범죄로 다룰 것이 아니라 공중 보건의 문제로 다루는 것이 바람직하다. 마약 중독자가 중독을 극복하는 데는 감옥에 가두는 것보다는 약물 남용 치료를 하는 것이 훨씬 치료 효과가 높을 뿐 더러 투옥보다 비용도 훨씬 싸게 먹힘을 보여주는 연구가 많다.
-어느 해 나는 동료들과 함께 수감자들이 받을 수 있는 재활 치료 프로그램 중에서 어떤 것이 재범을 예방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지를 출소하여 사회로 돌아간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했다. 재범을 예방하는 데 100퍼센트 확실한 효과를 보인 프로그램은 단 하나, 교도소에서 학위를 따는 것이었다.
-공화당 정치인들은 범죄와 싸우고 범죄자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이 범죄와 폭력으로 점철된 생활을 청산할 수 잇게 해주는 방법 가운데 우리가 지금까지 알아낸 가장 효과적인 프로그램 하나를 고의적으로 체계적으로 망가뜨렸다. 그리고 이런 비이성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일컫는 '범죄와의 전쟁'은 '마약과의 전쟁'과 마찬가지로 영어 단어의 평범한 뜻을 완전히 뒤집어엎는 효과를 가져온다. 그 본보기는 조지 오웰이 보여주었다. 오웰은 [1984년]에서도 '전쟁은 평화'고 '노예는 자유'라는 구호가 난무한다.
-아이를 심하게 체벌하면 아이는 폭력 성향이 더 높아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연구도 일관되게 나온다 .
-미국 의회와 사실상의 모든 주 의회는 집으로 침입한 강도한테 죽는 사람보다 집안에 있던 총 때문에 죽는 사람이 훨씬 많은데도 개인의 총기 소유와 사용을 법으로 금지하기를 거부한다. 공화당은 권총 규제에 반대하는 핵심 로비 집단인 미국총기협회를 지지하고 미국총기협회는 공화당을 후원한다.
5. 자살은 정치적인 문제다.
-어떻게 자살과 정치의 관계를 대중이 눈치채지 못하고 넘어간 것일까? 불완전하게나마 답변을 하자면 설령 의식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분할 정복 전략이 먹혀든다는 것이다. 즉 자살과 살인을 갈라놓는다는 것이다. 영국의 마거릿 대처가 그랬다시피 사회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극구 부정하는 것이 보수 정당에게는 유리하다. 사회는 정치가 효력을 발휘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업, 불황, 빈곤이 심화된다든가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자살률과 살인율이 올라간다든가 하는 식으로 사회 전반에서 벌어지는 일에 정당으로서 책임을 지고 싶지 않으면 이런 일들이 정당이 책임질 수 있는 여역 바깥에서 벌어지는 재앙으로 따로 떼어낼 필요가 있다.
-자신들의 정책과 시책으로 사회에서 일어나고 벌어지는 일과 자살률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며 버티는 것이 자살률을 끌어올리기만 하는 보수 정당에게 정치적으로 유리하다. 그러자면 자살은 정당의 정책이나 사회 조류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개인의 정신 질환이나 절망감 때문에 벌어지는 지극히 사사롭고 개인적인 행위라고 우겨야 한다.
-자살을 개개인의 정신 질환으로 보고 살인을 마찬가지로 개개인의 윤리적 결함으로 보는 것은 이 두 가지가 부준적으로는 사회·경제·정치적 압력으로 말미암아 벌어지는 정도가 얼마나 높은지를 도외시하는 태도다. 유전이라든지 인생 경험이라든지 개인의 성격 구조 같은 허다한 개인적 변수가 개인이 자살이나 살인을 저지르는 경향을 높이거나 줄일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폭력 치사가 전염병 수준으로 일어나는 것은 정치와 경제를 포함한 사회 환경에서 생겨난 변화 탓이다.
4장 수치심이 사람을 죽인다.
진보의 성패는 많이 가진 사람의 풍요에 우리가 더 얹어주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너무 적게 가진 사람에게 우리가 충분히 베풀어주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 프랭클린 루스벨트
우리는 사람들이ㅡ 계속해서 더 부자가 될 수 있는 미국을 보고 싶어 하는 당이다.
1. 폭력 뒤에는 수치심이 숨어있다.
무엇이 개인을 폭력으로 이끄는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폭력 치사라는 전염병을 이해하지도 설명하지도 못한다 .폭력문제가 나오면 모든 길은 수치심으로 통한다. 폭력 행위를 낳는 으뜸 가는 원인을 수치심으로 지목하면서 수치심은 폭력 행위를 낳는 데 충분하지 않아도 꼭 필요한 병원체라고 말했다. 수치심은 이런저런 이유로 누구나 느끼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심각한 폭력행위를 저지르지 않는다. 따라서 기질, 문화, 사회계급, 나이, 성별 등 폭력 행위를 결정하는 그 밖의 다른 요인들이 많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폭력이 발생할 때는 수치심과 굴욕스런 경험, 또는 이런 경험을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반드시 작용한다.
수치심은 실은 자기애(라고 해도 좋고 자부심, 자존심, 자존감 또는 자기가 쓸모 있다는 느낌이라고 해도 좋은데)라는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다.
수치심이 흔히 간과되는 이유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이 자신이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사실과 얼마나 부끄러움이 큰지 드러내기를 부끄러할 때가 많아서 그렇다.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가 수치스러운 것이다. 얼마나 약하고 무능하고 모자라고 열등하면 수치심을 느끼겠는가 하는 심리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수치심을 일으키는 사건이 객관적으로 '사소한' 것일수록 수치심이 더욱 커지는 것도 그래서 그렇다. 그래서 수치심을 더 많이 느끼는 사람일수록 폭력이라는 허세의 가면 뒤로 수치심을 숨기려 든다.
살인을 저지르고 감옥에 온 사람들에게 왜 다른 사람을 해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느냐고 물었을 때 내가 들은 대답은 놀랄 만큼 비슷했다. "병신 취급당했다"는 것이었다. "병신 취급당했다"는 말이 얼마나 자주 쓰였는지 줄여서 말하는 은어가 생길 정도였다.
사람들은 수치심때문에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울 때 자기 안에 있는 수치심을 남한테 떠넘겨서 수치심에서 벗어나려고 살인을 저지르거나 남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사람들이 남을 해치는 이유는, 더 약하고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남임을 증명하려는 마음에서다.
사람들은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운 수치심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탈출 수단으로 자살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남을 해치고 싶다는 충동이나 소망에 죄의식과 가책을 느낄 만큼 양심이 내면화된 사람에게는 자살 욕구가 수치심과 죄의식 둘 모두와 결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죄의식의 주성분은 자기 자신에게 겨누는 분노와 공격성이다.
정신역학으로 보았을 때, 수치심은 '자기 앞가림'을 할 줄 아는 능동적이고 자립적이고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성인과는 정반대로 남에게 사랑과 보살핌을 받고 싶어 하는 수동적이고 의존적이고 유치하고 사실상 '여자 같은' 것으로 보일 수 있는 부끄러운 소망을 억누르는 동기로 작용한다.
우리 모두는 늘 상호의존적이다. 남들로부터 도움과 지원을 받아야 하는 자신의 상황을 사람이라면 누구나 맞닥뜨리게 마련인 인간 조건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못나고 약한 증거라고 잘못 규정하는 사람은 지원을 받아야 하느 ㄴ자신의 처지를, 사기와 조작으로 부당하게 많은 복지 수당을 받으면서 놀고 먹는다는 이른바 '복지 여왕'에게 투사하여 모욕하고 부정하고 질책한다. 수치심은 그런 식으로 우파적인 정치 경제적 태도와 가치관을 자극할 수 있다. 수치심에 휘둘리는 사람에게 '복지'에 기대는 '의존성'은 동정의 여지가 없으며 부끄러워해야 하고 꾸짖어야 하고 내몰아야 하고 질타해야 하는 아주 몹쓸 짓이다 .
2. 수치심의 윤리와 죄의식의 윤리
수치심과 죄의식은 도덕의 감정이고 따라서 정치의 감정이기도 하다.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이 둘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두 가지 상반된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가치 체계의 감정인데, 이것을 정치적 용어로 표현하면 '우파' 이념과 '좌파' 이념이 된다. 도덕적 분쟁을, 즉 정치적 분쟁을 이해하려면 도덕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둘이 있고 정치도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둘이 있음을 꼭 아라야 한다. 도덕은 마치 단 하나의 도덕 체계만 있을 뿐이고 사람은 그것을 지켜야하지 안 그러면 비도덕적인 것처럼 몰아가지만 사실은 도덕 담론과 정치 담론이 처음 생겨날 무렵부터 도덕철학자들은 두 가지 상반된 도덕이 있음으르 잘 알았다.
수치심의 윤리는 수치와 굴욕이, 다시 말해서 불명예와 치욕이 가장 큰 악덕이고 수치의 반대, 곧 자부심과 명예가 가장 큰 미억으로 통하는 도덕 체계다.
죄의식의 윤리는 죄가 가장 큰 악덕이고 죄의 반대, 곧 순결이 가장 큰 미덕으로 통하는 도덕 체계다. 두 가치 체계는 상극이다. 가령 기독교라는 죄의식의 윤리에서는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악 중에서 가장 몹쓸 죄악이 바로 수치심의 윤리에서 가장 큰 미덕으로 통하는 자부심(교만)이다. 따라서 죄의식의 윤리는 아무도 남들에게 우월감을 못 느끼도록 평등주의를 옹호하고, 반면 수치심의 윤리는 우월한 사람이 있으며 그런 사람은 자부심과 명예(존경받음)을 만끽하고 열등한 사람은 열등감과 수치심을 느끼는 위계회된 사회 체제를 미화한다.
죄의식에 젖은 사람은 우리는 모두 죄인이라고 생각하며 우리가 남들에게 끼친 위해에 대해 남들로부터 용서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남들이 우리에게 끼친 위해에 대해 남들을 용서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위선이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수치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한테 내 손으로 복수하지 못하는 사람을 '명예'롭지 못한 자로 보고 복수는 허용되어야 마당한 뿐 아니라 꼭 필요한 것이라고 본다.
자부심의 반대는 겸손이고 겸손은 순결의 필수 조건이므로 죄의식의 윤리에서는 겸손을 가장 높은 미덕의 하나로 꼽는다. 반면에 수치심으 ㅣ윤리에서는 겸양은 자기 모욕에 맞먹기에 가장 몹쓸 악덕으로 본다. 이런 가치관의 차이로 생겨나는 한 가지 결과는 죄의식의 윤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부심을 누르고 겸손을 품는 길의 하나로 사회적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 동질감을 느끼려 하고, 반대로 수치심의 윤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부심을 끌어올리고 자신의 수치심과 열등감을 누그러뜨리는 길의 하나로 사회 경제적으로 우월한 신분에 있는 사라메게 동질감을 느끼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좀 더 쉬운 말로 표현하면 죄의식의 윤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약자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성향이 강하고 수치심의 윤리에 젖은 사람은 강자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성향이 강하다. ('초인'을 앞세우면서 예수의 '노예 윤리'에 맞서 '주인 윤리'를 역설한 니체도 수치심의 윤리를 부르짖으면서 후기 저작에서 자신은 '적그리스도'라고 밝혔다.)
수치심의 윤리와 죄의식의 윤리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는 죄의식의 윤리에서는 겁쟁이라고, 못논이라고, '범죄 앞에서 물러터졌다'고 손가락질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살인하지 말지어다"라는 도덕률의 중심 계율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수치심의 윤리에서는 "죽일지어다"가 중심 계율이며 이것은 죽여도 좋다는 뜻일 뿐 아니라 명예가 위태로울 때 (수치심에 휘둘리는 인격을 지닌 사람의 눈에는 대부분 명예가 걸린 문제로 보인다.)는 죽여야 할 의무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령 수치심의 윤리는 극형, 전쟁, 폭력적 자기 방어, 보복, 반목, 결투, 린치, 고문, '명예살인'같은 폭력들을 옹호하고 도덕적 이유에서 이 모든 것을 두둔한다.
서양사에서 윤리적 성찰이 막 시작되던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도덕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며 이 둘이 상극임을 알아차린 사상가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꼽을 수 있고 좀더 최근으로 내려와서는 니체, 소스타인 베블런, 장 피아제를 꼽을 수 있다. 이원론 도덕체계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 니체가 구분한 '주인 윤리'와 '노예 윤리'일 것이다. 니체의 두 윤리는 내가 여기서 구분하는 수치심의 윤리와 죄의식의 윤리와 아주 비슷하다. '주인 윤리'는 (과거 미국 남부의) 노예 소유 같은 '주인'노릇과 (전쟁, 복수, 사디즘 같은) 폭력 전반을 정당화하낟. 니체는 '노예 윤리'르 ㄹ예수가 산상수훈에서 선언한 기독교 윤리와 동일시한다. 이런 윤리는 자기 방어를 위해서도 폭력을 쓰지 못하게 학 이쪽 뺨을 맞으면 '저쪽 뺨을 내밀고' '악에 맞서지 말고' 나를 해친 사람을 용서하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므로 사람을 노예로 만들고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고 니체는 말한다.
수치심을 연구한 심리학자 중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학자 반열에 들어가는 실반 톰킨스는 수치심을 우파 정치의 가치관과 이념을 움직이고 지배하는 핵심 정서이며 죄의식은 좌파 정치를 움직이는 핵심 정서라고 갈파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의 통치라는 원칙에 입각한 평등주의적 정치 체제인 데모크라시(democracy) 곧 민주주의와, 명예로운 사람이 지배하는 체제라느 뜻을 지닌 티모크라시(Timocracy, 명예라는 뜻의 '티메time'와 지배라는 뜻의 '크라티아Kratia'의 합성어)구분한다. 플라튼에세 티모크라시가 실제로 뜻한 것은 명예와 군사적 영광이라는 원칙으로 지배되는 나라였다. (지난 역사를 보면 세계 여러 문화에서 귀족이 무인 계급을 이루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에서 이 두 원칙은 역사적으로 사실상 동의어가너 서로 분간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 말은 시민의 명예 곧 정치 권력이 그가 가진 부동산 소유권 곧 재산에 비례하는 나라를 뜻했다. 다시 말해 부자가 통치하는 나라였고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플루토크라시(Plutocracy), 곧 금권 정치에 해당한다.
3. 평등한 사회에는 폭력이 없다.
인류학자들은 수치 문화와 죄의식 문화를 구분했지만 최근에 와서 앞의 것은 명예 문화나 명예 수치문화로 불릴 때가 많다.
수치문화로 여겨지는 문화는 세계 곳곳에 있지만 죄의식 문화는 굉장히 드문 것으로 보인다. 극단적 죄의식 문화를 그런 대로 투명하게 드러내는 가장 분명한 사례는 내가 알기로는 아주 종교적이고 평화적이며 신약 성서에 적힌 대로 살아야 한다고 믿는 재세례파의 한 종파인 후터라이트다. 후터라이트는 '전정한 기독교인의 길은 걷는 ... 유일한 사람들임 자처하면서 재산도 공동체가 공유하고 생산도 같이 하고 물자도 나눠 쓴다." 후터라이트가 북아메리카로 이민을 온 뒤로 109년 동안 후터라이트 역사에서는 단 한 건의 살인도 일어나지 않았고(4만명에서 5만명 사이인 전체 인구 중에서) 자살은 딱 한 번 일어났다고 보고했다. 만일 후터라이트의 폭력 치사 발생률이 미국 전체 수준(1983년 현재 10만 명당 20명)과 맞먹는다면 1983년 한 해에서만 8명에서 10명이 죽었을 것이고 그 뒤로 20년 동안에는 타살자는 67~85명, 자실자는 93~115명으로 모두 160명에서 200명이 죽나갔을 테지만, 같은 기가 동안 후터라이트 사회에서는 타살자는 없었고 자살자만 딱 한 명 나왔다.
서율럽현대사에서 순수하고 극단적인 수치 문화의 가장 극단적인 예를 찾자면 그것은 나치 독일이다. 히틀러는 "베르사유의 수치를 바로잡겠다"는 선거 공약으로, 다시 말해서 베르사유 조약의 '전범' 조항과 연학국이 독일에 요구한 전쟁 배상금으로 말미암아 실추당한 국가 명예를 독일 국민 전체에게 되찾아주겟다는 공약으로 정권을 잡았다. 히틀러는 치욕을 바로잡고 국가 명예를 되찾는 유일한 길은 사실상 무제한의 폭력을 휘두르는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수치심과 폭력이 한몸임을 보여주는 좀 더 가까운 정치적 예로는 2001년 9월11일 뉴욕 쌍둥이 빌당이 무너지고 나서 오사마빈 라덴이 처음 내놓은 정치적 발언을 들 수 있다. 빈 라덴은 그날 일어난 폭력은 온 이슬람 민족이 유럽과 미국에게 당한 '80년의 모욕과 경멸'을 서양도 맛보게 만드는 길이었다고 말했다. 앞에서 언급했듯 수치 문화 속에 살며 수치심에 휘둘리는 인격에 걸맞는 가치관을 심어주는 수치심의 윤리에서, 수치심은 폭력이라는 수단으로만 지워버릴 수 있으므로 치욕을 당했으 ㄹ때 폭력은 정당할뿐더러 도덕적 책무가 된다
삶이나 인격이 수치심의 윤리 또는 죄의식의 윤리에 영향을 받는 사람은 각각 수치심에 휘둘리는 인격, 죄의식에 젖은 인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치심에 휘둘리는 인격의 예로는 반사회적 인격과 편집증적 인격을 포함하여 나르시시즘이나 경계선 성격장애유형에 속하는 인격, 권위주의적 인격을 들 수 잇다. 죄의식에 젖은 인격으로는 프로이트가 "도덕적 마조히스트"라고, "성공 때문에 망가지는 사람들"이라고 부른 집단이 대표적일 것이다. 내가 보기에 우리들은 대부분 이 두 극단 사이의 어디쯤에 있다.
수치심에 휘둘리는 정치적 가치 체계는 명예와 수치의 위계 구조에서 우월한 지위를 놓고 다투는 데 주안점을 두는 정당을 낳을 것이고 그런 정당이 사회를 자꾸만 위계적이고 불평등한 수치 문화로, 즉 폭력이 일어나기에 안성맞춤인 세상으로 몰아가리라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없다 .
더 평등주의적인 정치이념은 지위의 차이를 줄여서 사람을 수치로부터 지켜준다 .
5장 실직이 늘면 수치심이 커진다
1. 버림받은 사람이 되었다는 생각
6장 보수 정당 지지자와 진보 정당 지지자
1. 폭력적인 문화와 덜 폭력적인 문화의 대립
2. 폭력은 전염된다 .
3. 권위주의적 인격 대 평등주의적 인격
4. 나의 교도소 평등 실험 - 폭력은 없앨 수 있다.
7장 정치가 삶과 죽음을 가른다.
1. 살인과 자실은 정치의 풍향계다
2. 정치와 국민의 행복
3. 살인과 자살을 함께 보아야 하는 이유
4. 생명을 구하는 정치를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