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칠 수 있는 용기, 공포의 문화 - 파커 파머
공포의 해부
만약 우리가 훌륭한 가르침의 핵심인 상호연결성을 갖추고 또 그것을 심화시키고자 한다면, 우리는 '단절된' 생활이 가져오는 치우침을 이해하고 또 거부해야 한다. 왜 교육 문화는 상호연결성을 방해하는 것인가? 왜 우리의 학생과 학과로부터 우리 자신을 멀리 떨어지게 만드는 것인가? 왜 우리의 마음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가르치고 배우라고 하는가? 겉으로 볼 때 그 대답은 분명한 것 같다. 우리는 학점제도, 학과제도, 지나친 경쟁의식, 관료적인 교육제도 등으로 인해 학생들과 멀어지게 된 것이다.
교육제도는 분명 분열을 조장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분열된 상태를 제도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외부세계가 내부보다 더 강력하다는 신화를 굳건히 해주는 것이 된다. 교육의 외부적 구조가 우리의 내면적 풍경의 한 특징인 공포에 뿌리박고 있지 않다면, 우리를 이처럼 분열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 이렇게 된 것은 그 구조가 우리의 공포를 너무나도 잘 이용하기 때문이다. 공포는 우리의 동료, 학생, 학과,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를 떼어 놓는다. 공포는 더 넓은 상호연결성의 그물을 짜게 해주는 '진리와의 실험'을 폐쇄시킨다. 그리하여 우리의 가르치는 능력도 폐쇄된다.
나의 공포는 곧 학생들의 공포아 짝을 이룬다....
만약 우리가 외부의 개혁 에너지를 공포라는 내적 악마를 다스리는데 일부나마 전용할 수 있다면, 우리는 가르침과 배움을 혁신하는 방향으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잇을 것이다. 교육제도의 변화를 기다리면서 손놓고 있지 않아도 될 것이다. 우리의 공포를 이해하는 자기지식의 힘을 통해 우리는 단절의 구조를 극복할 수 있다.
우리를 이런 외부적 구조에다 붙들어 매는 공포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대답은 아주 쉬워보인다. 내가 제도적 권위에 승복하지 않으면 내 직장, 내 이미지, 내 지위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 대답이다. 그러나 이런 대답은 심층을 파헤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단절의 구조와 협력하게 되는 것은 그런 구조가 인간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공포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기 때문이다. 그 공포는 '타자'와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이 때 타자는 학생, 동료, 학과 내면의 반항하는 목소리 등 다양한 어떤 것이다. 우리는 타자가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말하고, 우리가 듣기 싫어하는 내용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상황을 두려워 한다. 우리는 우리의 조건을 관철시킬 수 있는 만남을 원한다. 그 결과를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고 우리의 자아의식과 세계관이 위협받지 않기를 바란다. ...
이처럼 생생한 만남을 두려워하는 것은 다양성을 두려워하는 공포에서 비롯된 것이다. ... 만약 우리가 다양성을 수용한다면, 우리는 그 다음에 나타나는 공포의 문턱에 다가가게 된다. 다양한 진리들이 만날 때 갈등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것이다. ...
갈등의 공포를 극복하면 그 다음에는 세 번째 껍질인 정체성 상실의 공포를 만나게 된다. 많ㅇ느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곧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문에 경쟁적인 만남에서 패배하면 상대방보다 훨씬 많은 것을 잃게 된다고 생각한다. 즉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는 것이다.
(두려움 : 타자와의 생생한 만남에 대한 공포 -> 갈등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공포 ->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 타자와의 생생한 만남이 우리의 생활을 아예 바꾸어 놓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
우리가 다양성, 창조적 갈등, 정체성의 공포를 모두 극복한다면, 그 다음에는 마지막 공포와 대면하게 된다. 그것은 타자와의 생생한 만남이 우리의 생활을 아예 바꾸어 놓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다.
타자는 늘 우리에게 변화를 받아들이라고 요청하고 있다. 새로운 사실, 이론, 가치뿐아니라 새로운 생활방식에 눈을 뜨라고 요청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여러 위협 중에서 가장 두려운 위협이다.
어떤 공포는 우리를 살아남게 하고, 심지어 배우고 성장하게 한다.... 두려움은 학생들의 생활 속에서도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알베르 카뮈는 이렇게 말했다. "여행이 가치 있는 것은 두려움을 주기 때문이다." 이 말은 낯선 진리를 찾아 학생들과 함께 생소한 땅으로 떠나는 교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카뮈는 낯선 것을 만날 때의 두려움, 우리의 생각, 정체성, 생활을 확대시키는 도전에 맞닥뜨렸을 때의 공포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진정한 배움의 벼랑 끝에 섰음을 뜻한다.
"어느 시점에 다다르면, 우리는 우리의 땅에서 너무 멀리 떠나 왔다는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ㅣ 그 순간 우리는 온몸에서 열이 나지만 동시에 온몸이 열리는 것을 느낍닏. 그리하여 약간의 접촉에도 전율하며 존재의 저 밑바닥에 도달하게 됩니다ㅣ. 우리는 빛의 폭포를 가로질러 영원과 만나게 됩니다."
진정한 배움에 '온몸을 열게' 만드는 두려움은 교육 효과를 높이는 건전한 두려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두려움을 권장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온몸을 열어 주는 것이 아니라 폐쇄시키는 공포를 먼저 처리하여, 상호연결성을 추구하는 능력과 가르치고 배우는 능력을 폐쇄시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나는 이런 폐쇄가 벌어지는 장소를 다음의 세 가지, 즉 학생의 생활, 교사의 자기 보호적 마음, 권위주의적 학문의 방법 등으로 나누어 살펴 보려고 한다. 교육상의 테크닉이 구조적 개혁은 결코 이런 마음의 병을 치유하지 못한다. 오히려 어떻게 공포가 우리의 생활을 제압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면밀하게 살펴서 예리한 통찰을 얻는 것이 급선무이다.
지옥에서 온 학생
학생들은 종종 연결의 능력을 마비시키는 공포를 느낀다. 우리가 이 사실을 분명하고 일관되게 볼 수 있다면, 그리하여 학생의 공포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해결해 준다면 우리는 더 좋은 가르침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제대로 본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오늘날 많은 교사들이 학생을 살펴보는 렌즈는 학생의 본 모습을 왜곡시키는 경향이 있다.
좋은 가르침에 방해가 되는 요인을 들어 보라고 교사들에게 요청하면 그들은 '학생들'이라고 자주 대답한다.....
학생들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물어 보면 이번에는 사회적 문제점을 지적하는 한결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무책임한 부모와 결손가정, 무기력한 공교육, 텔레비젼가 대중문화의 통속성, 알코올과 마약의 폐해, 이런 모든 것들이 학생의 마음과 생활을 크게 위축시켜 놓앗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뇌사상태라는 전제조건은 학생들의 뇌를 죽여버리는 교육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우리가 수동적인 자세의 학생들에게 정보만 흘려주는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한다면, 활기찬 상태로 교실에 들어왔던 그들은 지식의 수동적인 소비자가 되고 학교를 졸업하는 순간 지적으로 사망해 버리고 만다. 교사들이 학생들은 뇌사 상태라는 전제 아래 교육할 때, 그 순간부터 교실의 학생들은 죽어버리는 것이다.
그 당시 나는 교직 생활 25년째였다. 그러나 막상 '지옥에서 온 학생'과 마주치고 보니, 신참 교사 같은 어리석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오로지 그 학생에게만 집중함으로써 나머지 학생들은 내 눈 앞에서 사라지고 만 것이다. 나는 그 지루한 한 시간 동안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그 학생에게 털어넣었다. 그러나 내가 노력하면 할 수록 그는 점점 더 뒤로 물러났다. 한편 '지옥에서 온 학생'에만 집중하고 나머지 학생들은 돌보지 않암으로써, 그들이 내게 일종의 암호가 되어버렸다. 나는 그날 블랙홀이 무엇인지 생생히 알게 되었다. 그곳은 중력의 힘이 너무나 강하여 모든 빛의 흔적이 사라져버리는 곳이다.
.... 교실에서 입 다물고 뚱하니 앉아 있는 학생은 결코 뇌사한 젊은이가 아니다. 그들은 공포로 가득 찬 젊은이인 것이다...
'너희들은 가치있는 경험, 발언할 만한 목소리, 주목할 만한 미래, 기대할 만한 역할 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수십 군데에서 이런 메시지를 받은 학생들이 교실에서 침묵을 지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말해 봐야 배척과 거부뿐인데....
만약 학생들의 공포에도 불구하고 잘 가르치고 싶다면, 먼저 그들의 마음 속에 들어 있는 이 공포를 분명하게 보아야 한다. 그 어떤 수업 테크닉을 동원한다고 하더라도 '지옥에서 온 학생'이 있는 교실 풍경은 바꾸어 놓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그 풍경은 좀 더 다루기 어려운 내면의 문제, 즉 내가 그 학생의 태도를 예리하고 통찰력 있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학생을 그의 입장에서 비추어 이해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그림자에 비추어 이해한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주관전 오독은 나의 교직생활 중 최악의 순간을 만들어 낸다.
공포에 의해서 촉발되는 침묵, 침잠, 냉소 등은 무지에서 비롯되는 행동과 아주 비슷하다. 그래서 이런 행동을 하는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그것이 불안의 문제인지, 무지의 문제인지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런 비슷한 현상을 꿰뚫고 학생의 진정한 상황을 예리하게 살펴보는 안목을 갖추어야 한다.
나는 학생의 공포를 이해하면서 수업 방향을 새롭게 정립할 수 있었다. 나는 '학생들이 무지해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거겠지.'하고 지레 짐작하는 모든 것을 걷어치웠다. 그런 지레 짐작은 부정확할 뿐만 아니라 일종의 자기변명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나는 학생들의 두려워하는 마음을 상대로 가르쳤다. 그렇게 하면 그들의 마음이 스르르 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이제 넬 모튼이 한 말을 잘 이해한다. 그녀는 우리 시대의 가장 어려운 과업 중의 하나는 "남의 분위기를 잘 파악하여 그들이 말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공포에 잠긴 침묵의 가면 뒤에서 학생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찾고,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말해지기도 전에 그것을 듣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발언 공간을 만들어 주고, 다른 사람을 의식하고, 다른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다른 사람을 존경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공감하면서 학생드릐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교사가 그들의 개인적인 진실을 끝까지 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는 것이다.
'지옥에서 온 학생'의 이야기 속에는 학생의 분위기를 파악하여 발언하게 만드는 단서가 들어 있다. 젊은이는 문자 그대로 '운전대 앞에 앉아 있을 때' 자신의 목소리를 발견한다. 내가 강의할 때 수동적으로 교실에 앉아 있기만 한다면, 그는 침묵하는 존재가 되고 만다. 그러나 실질적인 책임을 부여하고, 나의 스케즐과 안전을 맡아 달라고 한다면, 그는 중대한 것에 대해서 말하려는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게 된다.
나는 가능한 한 학생들을 '운전대 앞에 앉히려고' 애쓰며, 그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찾고 또 자신의 애기를 활달하게 꺼낼 수 있도록 권장한다.
교사의 공포심
왜 교사는 학생들을 있는 그대로 뵈기가 그토록 어려운가? 왜 우리는 그들의 상태가 비정상적이라고 진단하여 뇌사 상태의 교수방법을 채택하게 되는가? 왜 우리는 학생들을 무지하고 무례하다고 비난하는가? 왜 우리는 학생들의 공포를 파악하여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찾아주지 못하는가?
어떻게 보면 그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우리의 전통적인 진단은 모든 책임을 희생자에게 전가함으로써 교사들의 결점을 덮어 두는 것이었다. 그러나 학생들의 공포를 잘 모르는 데에는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는데, 이것은 사실 굉장히 까다로운 문제이기도 하다. 무엇인고 하니, 우리 자신의 공포를 보기 전까지는 학생들의 공포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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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한 친구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눌 때, 우리 교사들은 다양한 공포를 토로한다. 아무리 일해도 알아 주는 사람이 없다, 보수가 적다, 너느 날 아침 교사라는 직업이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깨닫는다, 너무 사소한 것에 신경을 쓰면서 평생을 다 보낸다, 내가 사기꾼 같은 느낌이 든다 등등. 그러나 교사들은 또다른 공포에 시달린다. 즉 젊은이들이 우리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두려움이 그것이다.
우리는 날이면 날마다, 또 매 학기 초마다 새로운 교실에 들어가서 새로운 얼굴들과 대면하게 된다. 그러면 학생들은 때로는 미묘하게 때로는 노골적으로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당신은 이미 한물간 존재야. 당신이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우리는 별볼일 없다고 생각해. 당신은 우리가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은 생각마저 없어. 우리는 강요를 이기지 못해 여기 이렇게 앉아 있는 거야. 그러니 당신의 일을 빨리 좀 끝내 줘. 우리는 딴 데 볼일이 많으니까."
우리는 때때로 학생들의 신호를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은 학생들이 경멸하는 신호보다는 공포의 신호를 보낼 때가 더 많다. 나도 이런 메세지를 해독하는 방법을 배우기 전까지는 많은 학생들을 '지옥에서 온 학생'으로 치부해버렸다. 또 나에 대한 젊은이들의 평가를 두려워하고 잇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그 메시지를 해독하는 방법을 알아내지 못했다.
에릭 에릭슨은 성인의 발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중년에 도달하면 사람들은 정체감과 생산성이라는 문제 중 양자택일을 하게 된다.' ..
학생들에게 위협을 받는 선생들은 정체를 선택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의 경력, 교단, 지위, 연구실적 뒤로 자신의 몸을 숨긴다. 역설적이게도 정체를 선택하는 순간, 교사들이 그토록 무서워하는 학생들의 무관심한 태도가 나타난다. 자신을 가능하면 멀리하려고 하는 학생들에게 상처받은 교사는 겁먹는 상태로 학생들을 물리치게 되고, 공포의 사이클은 계속된다. ... 교직에 품었던 큰 희망이 무참히 깨지는 순간, 또는 자신의 경험을 정확하게 해석하지 못하는 순간 냉소주의가 나타나는 것이다. ... 제대로만 이해된다면, 이런 종류의 냉소주의는 희망을 재생시키는 씨앗이 된다. ...
교사들은 학생들을 회피할 것이 아니라 그들 쪽으로 다가서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야 한다.
"우리 사이에는 커다란 간격이 있다. 그 간격이 아무리 넓고 위험하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매워 볼 생각이다. 너희들이 앞으로 나아가는 데 나의 도움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내 삶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너희들의 통찰과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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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떨쳐 버리고 싶은 공포심은 늘 젊은 학생들에게 인기있는 교사가 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마음은 교사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데, 바로 이 점 때문에 교사가 학생들에게 잘 봉사하지 못한다. 이 공포심은 심리적인 것이다. 이런 심리가 강하면 학생들에게 아첨하게 되고, 교사로서의 위신과 객관적인 수업 방식을 잃어버리게 된다. 학생들 사이의 인기를 너무 의식한 나머지 뒷줄에 앉은 학생이 나를 싫어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고, 그 학생에게 강박적으로 집착하면 교실의 나머지 학생들에게 적절히 봉사하지 못하게 된다.
늘 나와 함께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공포는, 학생들에게 생명을 주는 상호연결성을 확보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나는 교실 맨 뒷줄에 앉아 있는 학생을 아예 무시해버리는 그런 교사가 되고 싶지 않다. '지옥에서 온 학생'이 나와 상관없게 될때 나의 생활 역시 이 세상과 무관하게 되는 것이다.
'지옥에서 온 학생'을 만난 경험을 깊이 반성하면서 나는 그날 학생들을 잘 가르치지 못한 나 자신을 질책한다. 하지만 그날 나의 가르침이 영 물거품만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몇 시간 뒤 그 학생이 나에게 접근해 와 자신의 깊은 고민을 털어놓았던 것이다. 내가 교실에서 한 어떤 행동이 그 젊은이를 새로운 인간관계 속으로 밀어 넣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진실을 토로한 것이다.
우리가 학생을 두려워하는 만큼 학생들도 우리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우리 자신의 공포는 물론 학생들의 공포를 해독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사제간의 원만한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그리하여 젊은이들에게봉사하는 창조성을 되찾을 수 있게 된다.
공포 어린 인식 방법
학생과 교사가 교실에서 느끼는 개인적인 공포는 교육이 위험한 땅에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악화된다.
...
교육의 핵심적인 두 가지 질문에 어떻게 답변하느냐에 따라 인식의 방법이 결정된다. 그 질문은 이렇다.
첫째,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둘째, 우리는 어떤 근거로 우리의 지식을 진실이라고 생각하는가?
... 이 답변은 우리가 가르치고 배우는 방식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만약 진리가 높은 권위에서 흘러내려 온 어떤 것이라고 인식된다면 교실은 독재체제가 될 것이다. 진리가 개인적인 변덕에 의해 결정되는 허구라고 인식된다면 교실은 무정부 상태가 될 것이다. 진리가 상호탐구의 복잡한 과정에서 생겨나는 어떤 것으로 인식된다면 교실은 자원이 풍부하고 상호의존적인 공동체가 될 것이다. 지식에 대한 우리의 전제조건이 교육의 밑바탕인 상호연결성을 개방시키기도 하고 폐쇄시키기도 한다.
지금의 교육 분야를 지배하고 있는 인식 방법은 교사, 학과, 학생 사이의 단절을 조장하고 있다. 그 방법이 공포에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방법은 소위 객관론이라는 것인데, 우리 자신을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사물과 정신적, 육체적으로 단절시킬 때 진리를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지식 획득 방법이다. ,,,,
객관론은 주관적 자아를 가장 두려워해야 할 적으로 여긴다. 주관은 의견, 편견, 무지 등이 가득 들어찬 판도라의 상자이며, 그 뚜껑이 열리는 순간 우리의 지식은 왜곡된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주관에 의해서 동요되지 않는 이성, 사실, 논리, 데이터 등에 전적으로 의지함으로써 그 뚜껑을 꼭꼭 닫는다. 이러한 구도에서 마음이나 감각은 우리를 이 세상에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과 멀리 떨어지게 한다. ............
이처럼 오염의 공포에 시달리는 객관론은 우리가 이 세상의 사물과 관계 맺는 것을 방해한다. 객관론의 운영 방식은 아주 간단하다. 그 주장은 이러하다. 우리가 사물과 거리를 유지할 때 그 사물은 비로소 대상이 된다. 대상이 된 그 사물은 이제 아무런 생명도 없다. 샘영이 없으므로 우리에게 감동을 주거나 변화를 줄 수 없다. 그리하여 그 사물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순수한 것이 된다. .... 이러한 인식 방법은 이 세상을 생명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릴 위험이 있다. 하지만 이 방법의 지지자들은 객관적 진리를 얻기 위해서 그 정도의 대가는 지불해야 한다고 말한다. .........
객관론은 진리를 제왕과 사제의 개인적인 변덕에서 해방시켜 좀 더 확고한 터전 위에 올려 놓으려는 시도였다. 그 점에 대해서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임의적인 권력의 손아귀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려 했던 객관론은 때때로 다른 힘과 결탁하여 현대인을 전제주의의 손아귀 속으로 밀어 넣었다. 모든 질문에 대하여 객관적인 답변이 가능하다고 믿게 되자 사람들은 자신의 지식을 불신하고 진리를 가진 듯한 권위자에게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사회적 불안의 시기에 권력욕에 사로잡힌 정치적 '권위자'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렇게 선언했다. "나만이 당신을 구제하는 진리를 가졌다. 무릎을 꿇고 나를 따르라.'
마녀 사냥이 잘못된 주관론의 결과였다면, 현대전의 잔학상은 잘못된 객관론의 결과이다.
(나의 생각 : 객관론은 객관적 근거를 요구한다. 나의 사적인 답변에 대해 객관적 답변을 댈 수 없을 때, 객관적인 연구를 했다는 학자들에게 그 답변을 의존하게 된다. 나에게는 진실이 없으며 객관적 근거를 제시하는 엘리트 그룹이 모든 답을 가지고 있고, 그들은 지식의 권력을 독점하며 지식을 통해 지배를 하기에 이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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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객관론은 전제주의 및 폭력과 담합하는가? 객관론은 주관론의 확대를 미리 예방하는 조치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객관적 진리를 확보하기 위해 '자아'의 씨를 말리려 했다. 독재자들이 '공안'을 확보하기 위해 반대자를 죽이는 것처럼 혹은 전사들이 '평화'를 확보하기 위해 적을 죽이는 것처럼, 그렇게 행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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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론에 반대하는 나의 입장은 지금껏 규범적인 것이었다. 자아와 사물을 둘 다 두려워하는 객관론은 자아와 세상을 단절시키고, 그리하여 학과, 학생, 우리 자신 사이의 관계를 왜곡시켰다. 그러나 객관론에 대하여 좀더 강력한 반대 주장을 펴자면, 객관론은 지식이 실제로 어떻게 발생하는지 충분히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어떤 과학자도 이 세상을 멀찍이 떼어 놓는다고 해서 이 세상을 잘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인식하는 자와 인식 대상 사이의 객관론적 장벽을 설치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 벽에 대해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과학은 이 세상에의 참여를 요구하고, 또 인식하는 자와 인식 대상 사이의 생생한 만남을 요구한다. 이러한 만남에는 때로는 객관적인 거리도 필요하겠지만, 친밀함의 순간이 없다면 생생한 만남이 될 수 없다. ...
지식은 우리가 알 수 없는 타자와의 일체감을 이루는 방식이다. .......... 지식은 관계를 추구하는 인간적인 방식이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우리를 변화시키는 만남과 교류를 경험하게 되는 방식이다. 가장 깊이 있는 수준에서 볼 때, 지식은 언제나 상호연결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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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론은 지식에 대한 진실을 말하려는 방법론이 아니다. 오히려 지식이 힘이고 지식으로 이 세상ㅇ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과대망상적 신화를 부추기는 장치로 쓰인다. ....
객관론은 너무나 심각하게 우리를 이 세상과 단절시켰다. 그리하여 우리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행동을 자꾸하게 되었다. .. 객관론은 우리의 인식 방법에 대하여 진실을 말해 주기는 커녕, 과학, 기술, 권력, 통제 등에 대한 환상만 잔뜩 심어준 신화일 뿐이다. .........
관계적 지식 획득 방법 - 사랑이 공포를 물리치고 공동 창조가 통제를 대체하는 방법 -은 상호연결성을 회복시켜 준다.
두려워 하지 말라
공포는 우리를 모든 것과 단절시킨다. 이처럼 공포에 둘러싸인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그 공포를 초월하여 훌륭한 가르침과 배움의 현실에 연결될 수 있겠는가? 우리를 훌륭한 가르침과 배움으로 데려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영혼'의 방향이다.
'두려워 하지 말라'는 것은 우리가 공포를 자져서는 안된다는 뜻이 아닏. 만약 그런 뜻이라면 실현 불가능한 것이므로 마땅히 배척해야 한다. 이 가르침의 핵심적인 교훈은 우리 자신이 공포 그 자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나는 늘 공포를 느끼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 자신이 공포 그 자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내 마음의 풍경에는 공포말고 다른 것들도 많이 들어 있으며 그것들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힘을 얻는다. 교실에 들어갈 때마다 나는 진정한 가르침의 원천이 되는 내 마음의 어던 장소에 기댈 수가 있다. 그것은 내 가르침의 목표인 학생들의 내면 풍경 중 어떤 장소를 겨냥하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반드시 공포의 자리에서 가르쳐야 할 필요는 없다. 공포와 함께 내 마음속에 들어 있는 호기심, 희망, 공감, 정직 등의 장소에 서서 가르칠 수 있다. 공포를 느끼기는 하지만 공포 그 자체가 될 필요는 없다. 나는 마음 먹기에따라 마음의 풍경 중 다른 장소에 서 있을 수 있는 . .............
"어떻게 하면 상호연결성을 파괴하는 공포를 극복할 수 있을까?"
'공포를 물리치는 상호연결성을 회복하라.'.........어떻게 하면 우리는 동그라미 안으로 들어 갈 수 있을까? 우리를 단절시키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을 때, 우리를 타자와 손잡게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그 동그라미가 이미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영혼 속에서는 정반대되는 것들 - 사랑과 미움, 웃음과 눈물, 공포와 욕망-이 늘 동그라미를 그리며 서로 추적하고 있다. 상호연결성을 두려워하는 우리의 강렬한 공포와 그에 따른 불편함은 상호연결성을 바라는 강렬한 욕망과 그에 따른 편안함에 맞물려 있다. 단전에 의해 우리 자신을 보호하려는 필사적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영혼은 상호연결성을 영원히 동경한다. '아 절연되지 않기를...' 우리는 우리의 공포 앞에서 혹은 뒤에서 마구 달리고 있는 상호연결성이라는 동경에 우리 자신을 맡김으로써 이미 우리 내부에 들어와 있는 동그라미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
공작 교사는 자신의 공포 앞에서 혹은 뒤에서 따라오고 있던 내면의 동경에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교장, 학생, 일의 세계, 교사의 마음 등과 단절되지 않으려는 동경이었다. 그 동경이 시키는 대로 행동함으로써 그는 공포를 이겨냈다. 때때로 공포를 극복하는 방법은 이처럼 간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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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커 파머의 '공포의 해부'중에 의미있게 다가온 모든 문장을 그대로 따라 기록했다. 모든 문장 하나 하나가 나를 위로했다가 공감했다가 힘을 주기도 했다. 부끄러운 내 자신이 보였을 때는 숨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파머는 훌륭한 가르침은 상호연결성이라고 말한다. 무엇이 상호연결성을 방해하는가? 라는 질문에 '공포'라고 답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공포는 첫째, 생생한 타자와의 만남인데, 이는 다양성을 두려워 하는 공포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두번째는 다양한 진리를 만날 때 갈등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라고 한다. 세번째는 정체성 상실의 공포라고 답한다. 네번째는 가장 두려워하는 것인데, 그것은 타자와의 생생한 만남이 우리의 생활을 아예 바꾸어 놓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라고 한다.
결국 변화에 대한 요구가 가장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공포는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폐쇄시키는 공포도 있지만, 열리게 하는 공포도 있다고 하면서 알베르 카뮈의 말을 인용한다. 진정한 배움에 '온몸을 열게' 만드는 두려움은 교육 효과를 높이는 건전한 두려움이라고 말한다.
폐쇄가 일어나는 장소 인 '학생의 생활', 교사의 자기 보호적 마음', '권위주의적 학문' 별로 공폴르 탐색한다.
'학생의 생활'에서 살펴본 내용은 학생도 공포를 느낀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사는 학생들의 공포를 볼 수 있는 안목이 없고, 그저 학생들을 좋은 가르침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많이 언급한다. 뇌사상태에 있는 학생으로 이해할 수록 교육은 수동적이고 결과적으로 뇌사에 빠진 학생을 길러낸다고 경고한다. 학생들의 공포를 바로 볼 수 있어야 하며, 그를 위해서는 학생들의 두려워하는 마음을 상대로 가르치라고 한다. 이는 학생들에게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라는 의미다. '운전대 앞에 앉히려고 ' 애쓰라고 한다.
'교사의 자기 보호적 마음'에서는 '교사의 공포심'을 다룬다. 교사 자신의 공포를 보기 전까지는 학생들의 공포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교사의 공포도 여러 가지있지만, 가장 큰 공포는 학생들이 교사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두려움이라고 한다.
학생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나... 내게도 가장 큰 두려움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 파머는 에릭 에릭슨의 이야기를 빌려 '정체감'과 '생산성'의 간극에서 '생산성'을 선택할 수 있도록 권고한다.
또한 교사의 두려움은 '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교사가 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또 하나는 학생들에게 생명을 주는 상호연결성을 확보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내게 가장 단절을 불러 오고 있는 나의 핵심 두려움이 모두 진술되어 있다.
'권위주의적 학문'영역에서 살펴 본 두려움의 내용은 '객관론의 문제'였다. 객관론은 주관론을 배척하는 과정에 자아의 씨를 모두 말려버리고 말았으며, 세상과의 단절을 가져왔다. 그러나 지식은 언제나 상호연결적이라고 강조한다.
어떻게 상호연결성을 파괴하는 공포을 극복할 수 있는가?
그의 답은 마음의 다양한 풍경 속에서 다른 풍경의 자리를 선택하라고 한다.
또한 공포를 물리치는 상호연결성을 회복하라는 논리적 순환법을 사용했다. 같은 말 반복인데, 파머는 우리의 삶이 동그라미 라고 말한다. 공포에 대한 불편함이 있고, 상호연결성에 대한 동경이 모두 존재한다. 서로 동그라미로 맞물려 있는데, 그 동그라미 속으로 들어가라는 말이다.
내 삶에 적용해본다면, 단절의 아픔을 경험하면서도 다시 상호연결성을 동경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으로 다가온다. 상호연결성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파머의 최종답변이 아닌가 싶다.
첫장에 릴케의 시에 '절연되지 않기를...'를 자주 언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