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그림, 시

올 줄 - 박노해

평화숲 2016. 2. 17. 23:37


올 줄

 

눈이 침침해졌다

컴퓨터도 안 하고

트위터도 안 하고

TV도 안 보는데

책을 너무 본 탓인가

 

뭔가 내 안이 흐려진 것이다

 

책을 덮고 나무 사이로 걷다 보니

어린 날 범수 아제 생각이 난다

동강면 최고의 목수이던 범수 아제는

아름드리 나무를 손으로 깎아 기둥을 세우고

톱으로 켜고 대패로 밀어 판자를 만들었지

향긋한 나무 향이며 장작불의 온기며

둥근 대팻밥에 구워주는 짱뚱이 안주가 좋아

나는 작업 마당 범수 아제 곁에서 놀곤 했지

 

손대패로 민 매끄러운 나무판 위에

먹줄로 수평을 반듯하게 띄워놓고

평아 올이 바르게 섰능가 보그라

올이 바로 됐냐

 

자 간다이

토웅, 먹줄을 튕기면

푸르르 떨며 검은 일직선이 그려지고

후유, 올바로 됐제

요 올 줄이 내 목숨줄이나 한가지여

올을 바르게 하고 나면 일사천리여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올 줄을 감아 들이곤 했다

 

범수 아제는 일이 안되는 날은

마을 뒷산 나무 사이를 홀로 걸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앉았다 일어섰다 하곤 했었지

 

나가 시방 심란허네

신명(神明)을 잃어 부렇네이

내 맘 속에 올이 얽혀 부렇어야

도청 대목장 일솜씨를 보고

나가 맘이 급해져 부렀능가

영 눈이 침침하고 흐릿해져 부렇네

그래서 시방 나가 일을 멈추고

내 맘속의 올을 첨부터 바로 감아

정돈하고 있는 것이 아니것냐이

 

그래, 내 눈이 침침해진 건 뭔가

내 마음속의 올이 엉켜버린 것이다

너무 많은 그럴듯한 자식들이 눈을 타고 들어와

하늘로 이어진 내 마음속의 올바른 줄이

느슨하고 흐릿해진 것이다

 

먼저 마음 줄을 올바로 세워야겠다

올 줄만 팽팽히 바로 서 있다면

먹줄을 튕기고 일사천리로 가는 건 그 다음이다

나무들은 처음부터 자기 씨앗 안에

이미 다 들어 있는 것을 올바로 풀어쓸 뿐

 

머리를 그만 쓰고 가슴을 써야겠다

()를 쓰지 말고 마음을 써야겠다

 

 

 

-박 노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