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제와 포용 1장. 거리두기와 소속되기 -미로슬라브 볼프
1장 거리두기와 소속되기
- 공모
한 세기 전 프리드리히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지적했듯이, 예술가들은 "기득권이나 새로 등장한 권력의 비위를 맞추는 아첨꾼"인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 예술가들이 제국주의 발전에 공모한 것에 대해 실망하든지 냉소하든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섣불리 그들을 비난하거나 손가락질해서는 안 된다. 우리 역시 역시 나름대로 제국주의 팽창에 공모해 왔기 때문이다. 프란츠 파농은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에서 식민지 교회가 "외국인의 교회"가 되어 "식민지화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외국의 영향력을" 이식한 것에 대해 꾸짖을 때, 그의 비판이 전적으로 그른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녀는 원주민을 하나님의 길로 이끌지 않고 백인 남성, 주인, 압제자의 길로 이끌었다."고 말한다. ... 그는 기독교 선교를 "서구 문화의 지배를 위한 도구라기보다는, 토착어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종교적 변화와 사회적 변혁이라는 결과를 낳은 번역 운동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 어떤 의미에서 공모 자체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그 속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행동양식이다. 우리는 주변 문화를 너무 편안하게 느낀 나머지 그 문화가 지닌 많은 악을 보지 못하며, 그 결과 그 악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는 커녕 그 악을 우리 나름대로 변형하여 -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한 양심을 가지고 -제공한다. 우리와 함께 이런 흉내내기에 가담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종파주의자라는 낙인을 찍는다. ...
...문화적 정체성을 신성화하고, 이를 통해 잔혹한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을 배신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 채 (세르비아 전사들이 구 유고슬라비아에서 이슬람교인들을 제거하기 위해 벌인 전쟁에서 볼 수 있듯이) 이 '거룩한' 살인자들은 심지어 자신들이 기독교 신앙의 용맹한 수호자라고 생각한다. 이렇듯 한 문화의 '소금'이 되어야 할 기독교 공동체가 그 주위의 모든 것과 같이 맛을 잃은 상태가 되는 경우가 매우 많다. ....
...교회는 교회가 자리잡고 있는 문화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나는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을, 문화로부터이 거리두기와 문화에 소속되기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만들어 감으로써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거리두기란 무엇을 뜻하는가? 소속되기란 무엇을 뜻하는가? 무엇을 위한 거리두기인가? 어느 정도의 소속되기가 필요한가? 이런 물음에 답하려면 심오한 신학적 문제를 다뤄야만 한다. 나는 첫째로 아브라함에 대한 부르심을 통해, 둘째, 그것의 기독교적 전유를 통해 종교적 정체성과 문화적 정체성 사이에 어떤 관계적 함의가 있는지 살펴봄으로써 이 문제를 논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는 기독교적인 문화적 정체성을 구축할 때 '타자'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하는지, 그런 입장을 뒷받침하고자 할때 교회는 어떤 종류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지에 관해 논하고자 한다.
- 떠나라
기독교 신앙의 기초에는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이 우뚝 서 있다. 그는 "믿는 모든 자의 조상"(롬4:11)이다. 무엇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런 칭호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 이에 대한 사도 바울의 대답은 "믿음"이다. ...
... 그러나 우리는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믿었다"(창15:6)라는 말씀을 읽기 전에, 그가 "떠났다"(12:4)라는 말씀을 읽는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
...복이 되고자 한다면 그는 머물 수 없다. 근원적으로 자신을 규정했던 모든 관계를 끊고 떠나야 한다. 이 모험이 뿌리 뽑힌 식물처럼 자신을 말라죽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유일한 보증은 하나님의 말씀, 즉 그의 삶 속에 가차 없이 불편하게 끼어든 신적인 '나'의 약속뿐이었다. .. 모든 가문과 모든 문화의 하나님이신 그분께 순종하는 믿음을 통해 자신의 문화적, 가족적 관계를 끊고 조상의 신들을 포기할 수 있었던 (수24:2) 용기가 바로 최초의 아브라함 혁명이었다. 아브라함이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후사를 주실 것이라는 믿음만큼이나 본토를 떠날 수 있던 믿음 때문이었다.(히11:8)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이야기는, 물려받은 문화적 관계에 빠져드는 대신 거기로부터 빠져나오는 것과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강조한다. ...
..... 그리스도인이 가진 정체성의 핵심은 충성의 대상을 전면적으로 교체하는 것이다. 주어진 문화와 그 신들을 버리고 모든 피조물으 ㅣ하나님만을 섬기리로 결단하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모든 충성으 대상을 재조정해야 한다. 예수님이 첫 제자들을 부르실 때처럼, "그물"(경제)과 "아버지"(가족)을 버리고 떠나야 한다. (막1:16~20). 떠난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하는 정체성의 필수 요소다.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기 때문에, 리처드 세넷이 [눈의 양심]에서 말했듯이 우리 신앙은 "머루름과 불화한다".....
.... 이러한 들뢰즈의 사상과 아브라함의 '유목적' 삶을 대조해 보라. 아브라함은 흐름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앞으로 나아가기로 작정했다. 부르심과 그에 순종하겠다는 결단은 적극적인 행위자, 안정적인 주체를 전제한다. 그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떠남에는 출발점이 있었으며, 명확한 목적-큰 민족을 이루고 영토를 소유하는 것-이 있었다. 여기서 떠남은 일시적 상태일 뿐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다. 떠남은 모든 장소로부터가 아니라 특정한 장소로부터의 떠남이다. ...
..."당신의 관계의 망 안에 머물라."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주는 반대쪽 비판자들의 충고일 것이다. .. 그들에게 아브라함은 스스로를 분리하고("떠나") 자신의 독립과 영광을 확보하고("큰 민족") 자신에게 정항하는 이들을 진압하고("저주하리니") 자신을 찬양하는 이들에게 호의를 베풀고("복을 내리고") 마침내 자신의 권력을 세상 끝까지 확장하기("땅의 모든 족속이")를 갈망하는 남성의 전형처럼 보인다. 아브라함은 전적으로 초월만 강조하고, 내재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다. ...
..아브라함은 "관계의 장"안에 머물러야 했을까? 첫째로 아브라함의 떠남은 관계성의 부인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라. 그는 정주하지 못하고 떠도는 외로운 근대적 주체가 아니다. 근대성에서는 "타자에 전혀 구속되지 않는 해방"을 추구한다. 반면 아브라함은 가장 근원적으로 하나님께 묶여 있다. ... 오히려 그는 유랑하는 공동체에 둘러싸여 있다. .... 만약 사라 그녀가 내재성을 상징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공통된 초월성이 가지는 내재성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
...아브라함 같은 떠남이 필수적이며 유익하다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자신들의 기원을 아브라함의 떠남에서 찾는 사람들이 주위의 사람들과 문화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하기 때문에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이슬람교인들의 공통된 조상인 아브라함이라는 탁월한 인물로부터 방향을 돌려 사도 바울을 주목하고자 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다고 생각햇을까?(갈 3:16)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초기 기독교가 그 이야기를 전용하는 방식으로 관심을 돌리는 것은, 아브라함의 떠남에 관한 본래의 이야기가 어떻게 변형되었는지 살펴봄으로써 아브라함의 자손인 그리스도인이 문화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갈르 탐구하겠다는 뜻이다.
- 버리지 않고
바울은 혈통적 관계가 종교와 무관하며 오직 믿음만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지평은 전 세계였으며, 그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한 아브라함의 자손-의 복음을 전하고 다인종 공동체의 기초를 놓은, 여행하는 선교사였다. 왜 혈통의 육체성으로부터 믿음의 순전한 영성으로, '민족성'이라는 특수성으로부터 다문화성이라는 '보편성'으로, 땅의 지역성으로부터 세계의 포괄성으로 이동한 것일까?...
... 갈라디아서 3:1-4:11에 제시된 것 처럼, 그의 종교적 신념으 핵심과 관련된 이 문제에 대한 바울의 해법은 단순하지만 그럼에도 긴밀하게 상호 연관된 세 가지 방법으로 이뤄진다.
첫째, 바울은 한 분 하나님의 이름으로 토라를 상대화한다. 한 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요구하는 하나된 인류의 가족을 만들어 낼 수 없는 토라는 "한분 하나님 뜻의 최종적이며 영구적인 표현"일 리가 없다. 여전히 중요하지만 토라는 언약의 일원이 되기 위한 필수 요소가 아니다. 둘째, 바울은 평등을 위해 혈통을 폐기한다. 약속은 "믿음에 의한 것이어야 하며, 그러므로 은총에 따라 주어 질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은총에 의해서가 아니라 법적 권리처럼 인종에 따라 상속받는 사람들이 있는 셈이다." 셋째, 바울은 이 땅의 모든 가문을 위해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시며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분 안에서 하나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 땅의 모든 가문이 "아브라함의 약속된 한 가족"안으로 받아들여짐으로써 똑같이 복을 받는다.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의 긴장에 대한 바울의 해법은 독창적이다. 논리는 간단하다. 하나님의 한 분이심은 하나님의 보편성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보편성은 인류의 평등을 함의한다. ...
...바울이 그 속에서 온 인류의 통일성을 추구하고자 한 '일자'는 몸과 분리된 초월성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일치의 '원리'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그 이름은 십자가 위에서 고통당하신 육체를 지닌 인격체를 가리킨다. ....
....하나님의 메시아의 고통당하신 몸이라는 특수성으 스캔들에 통일성과 보편성의 기초를 둔 바울의 사상은, 분화되지 않은 보편적 영혼을 가장 중요시하며 "몸을 지니고 있음을 수치스러워하게" 만들고 "자신의 인종이나 부모, 조국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신념들과는 구조상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첫째로, 기독교 공동체의 토대인 십자가에 대해 생각해 보라. 그리스도는 여러 다른 '몸들'을 한 몸으로 연합하신다. ... 그 연합은 그분의 고난을 통해 이루어진다. 엘런 차리의 말처럼,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민족, 국적, 성차, 인종, 계급에 관계없이 한몸을 이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중요핟. 사도 바울은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표면적으로는 빵의 단일성이 몸의 통일성의 토대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하나의 빵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 자기 폐쇄적인 단일성으로 남아 있기를 거부하고 자신을 열어 다른 이들이 자유로이 그 안에 동참 할 수 있게 해주신 그 몸을 상징한다. ... 그러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메시아는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써 통일성을 만들어 내신다. 십자가는 다자에 맞서 일자를 주장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다자를 위해 일자가 자기를 내어 주는 것이다. 여기서 통일성은, ''몸들'의 특수성을 지워 버리는 '신성한 폭력'의 결과가 아니라, 그들 사이의 적대감을 무너뜨리는 그리스도의 자기 희생의 결실이다. 바울의 관점에서 분리하는 벽은 '차이'라기 보다는 적대감이다. (엡2:14) 따라서 해법은 '일자'일 수가 없다. 단일한 의지를 강요하거나 단일한 법에 따라 통치하는 것으로는 적대감을 제거할 수 없다. 적의는 오직 자기 내어줌을 통해서만 "소멸"할 수 있다. 평화는 "십자가"로, 그리고, "피"를 통해 이루어진다.
둘째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내어주심으로써 만들어진 공동체를 일컫는 핵심적 명칭인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 생각해 보라.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그분 안에서 유대인과 헬라인이 세례를 통해 연합되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복수적인 육체성으로부터의 영적 도피처, 보편적 인간 본질의 분화되지 않은 동일성만 허용되는 순전히 영적인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음으로써, 분화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한 백성을 이룬다. 몸에 새겨진 차이들은 제거되는 게 아니라 한 데 모아진다.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자기 희생에 차명하는 이들의 분화된 몸들-유대인과 이방인, 남자, 여자, 노예와 자유인-이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삶을 살아간다. 바울은 몸의 특수성으로부터 영혼의 보편성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분리된 몸들로부터 상호 연관된 몸들의 공동체 즉 다수의 개별적인 지체들을 지닌 성령 안에 있는 한몸으로 움직였다.
성령은 몸에 새겨진 차이를 지워 버리지 않으며, 차이를 가진 사람들이 똑같이 그리스도의 한몸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신다. 성령이 지워 버리시는 것은, 사회적으로 구성되어 고착화된 '차이'와 '사회적 역할' 사이의 상관 관계다. ...
...참된 기독교적 떠남은 단지 거리두기에 그치지 않고, 언제나 현존의 차원을 지닌다. 노력과 투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이미 누리고 있는 안식과 기쁨이 있다. ...
.... 한 문화로부터 적절하게 거리를 두고자 할 때 그리스도인은 그 문화를 떠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기독교 문화'로 도피한 내부자가 됨으로써 자신의 문화에 대해 외부자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복음의 부름에 응답할 때, 한 쪽 발을 자신의 문화 바깥에 두지만 다른 한쪽 발은 그 안에 견고하게 뿌리내리게 한다. 그들은 거리를 두지만 또한 거기에 속해 있다. 그들의 차이는 문화에 내재한다. 그들의 내면성 - 그들의 내재성과 소속되기- 때문에 몸에 새겨진 특수성들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들의 차이- 그들의 초월성과 거리두기-때문에 보편성이 긍정된다.
거리두기와 소속되기는 모두 필수적이다. 거리두기 없는 소속은 파괴적이다. ....그러나 소속 없는 거리두기는 고립적이다. ... 고립적인 '소속없는 거리두기'는 파괴적인 '거리두기 없는 소속'으로 변질된다. 문화에 대한 거리두기는 그 문화로부터의 도피로 퇴보해서는 안 되고, 문화 안에서의 생활방식이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바울에 의해 이루어진, 원초적 아브라함 혁명의 창조적 재전용이다. 아브라함의 한 분 하나님의 이름으로 바울은 특정한 한 민족을 개방하여 많은 민족이 참여하는 하나의 보편적인 다문화 가족이 되게 했다. ... 아브라함이 받은 땅을 상속할 것이라는 약속을 바울은 세상을 상속할 것이라는 약속으로 고쳐 말한다. '땅'을 '세상'으로 바꿈으로써 새로운 의미의 장이 열렸고 그것은, 보이어린의 말처럼, "유대교로 하여금 세계 종교가 되게"만들었따. 본토, 친척, 아비의 집으로부터 떠나라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본래의 부르심은 그대로 남아 있다. 바울이 가능하게 한 것은 버리지 않은 채 떠나는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떠남이 유대민족이라는 한몸 안에서 실천되는 반면, 그리스도인의 떠남은 그리스도의 한몸 안에서 자리잡은 다양한 민족의 수많은 몸 안에서 실천된다.
-문화, 보편성, 공교회성
그리스도인이 버리지 않고 떠날 수 있으며, 그들의 거리두기는 언제나 소속을 포함하고, 그들의 소속은 거리두기의 양식을 띤다고 가정해 보자. 이 거리두기는 어떤 긍정적인 공헌을 할 수 있을까? 이에 답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자신의 문화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하는 까닭에 대해 생각해 보자. ... '하나님과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로운 세상의 이름으로' 우리가 속한 문화보다 더 중요한 실재가 존재한다. 바로 하나님과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새로운 세상, 모든 민족과 모든 종족으로부터 사람들이 자신의 문화적 산물ㅇ르 가지고 삼위일체 하나님 주위에 함께 모이고, 그분이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고 '더 이상 아름이 없게 되는' 그런 세상이다. (계21:4)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그 분이 약속하신 미래에 궁극적인 충성을 바치기 때문에 자신이 문화로부터 거리를 둔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충성의 결과로 얻게 된 거리두기는 두 가지 중요한 공헌을 한다. 첫째, 그것은 우리 안에 타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낸다. ...... 보편적 인격은 타자성에 의해 더 풍성해진 인격, 다수의 타자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그 안에 반영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그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된 인격이다. 성령에 의한 거듭남의 결과로 나 자신의 문화로부터 거리를 둘 때, 그 거리는 내 안에 타자들이 들어 올 수 있는 틈을 만들어 낸다. 성령은 "너는 단지 네가 아니며, 다른 사람들도 너에게 속해 있다"고 말씀하시며 내 마음의 빗장을 벗겨 내신다. 보편적 인격은 보편적 공동체를 요구한다. 복음이 많은 민족에게 선포될 때 교회는 많은 문화에 뿌리를 내리면서도 그 문화의 심대한 영향을 받는 동시에 그 문화를 변형시켜 왔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이 한 분이시듯, 다양한 문화 속에 자리잡은 수 많은 교회도 하나다. ... 다른 문화들은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함에 대한 위협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풍성하게 해줄 잠재적 자원이다. ...
... 새 창조의 성령에 의해 만들어진 거리두기의 두 번째 기능 역시 중요하다. 이 거리두기는 모든 문화 속의 악에 대해 심판을 요구한다. 나는 보편적 인격이 다수의 타자에 의해 풍성해지는 인격이라고 말햇다. 하지만 보편적 인격은 모든 타자성을 통합해야 하는가? 우리는 모든 문화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가? 강간, 살인, 파괴에 대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가? 국가주의적 우성과 '인종 청소'에 대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가? 통합할 줄만 알고 구별할 줄은 모르는 보편적 인격이라는 개념은 기괴한 것이다. 평화로운 종합으로 결코 용해시킬 수 없는, 도둠지 받아들이기 힘든 관점들이 존재한다. 결코 용인할 수 없는 악한 행위들이 존재한다. '심판'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 그러나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베드로전서 4:17)- 자아와 그것이 가진 문화 안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 악을 극복하고자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자신 안에 있는 악과 싸워야 한다. 성령이 만들어 내시는 거리는 자신의 자기 기만, 불의, 파괴성에 대해 눈을 뜨게 한다. ...
자아와 타자 안의 거짓, 불의, 폭력에 맞서는 싸움은 거리두기 없이는 불가능하다. ...
.. 우리 문화가 조장하는 집단적 생존과 번영의 이미지는 너무나 쉽게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에 대한 우리의 전망을 흐리게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미국이 기독교 국가이며, 민주주의만이 유일하게 참된 기독교적 정치 체제라고 생각한다. 우리 문화가 우리 신앙을 전복했음을 깨닫지 못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문화를 심판할 수 있는 위치를 잃어버리고 만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충성을 순수하게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기독 교회의 다문화적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더 강화시켜야 한다. 우리는 다른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다른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의 눈으로 우리 자신과 하나님의 밀애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바라 볼 필요가 있다. ...
.. 갈등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평화의 중재자가 아니라 전쟁의 공모자가 되는 경우 많다. 우리는 우리가 문화로부터 스스로 거리두기가 어려우며, 그저 지배적 견해를 되풀이하고 그 관습을 모방할 때가 많음을 깨닫는다.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생생하게 유지하고자 할 때, 우리는 전선 너머로 손을 뻗어 반대편에 있는 우리의 형제자매들과 손을 맞잡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들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문화와 이 문화가 지닌 고유한 편견으 ㅣ울타리 너머로 우리를 이끌어 낼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럴 때 "한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새롭게 읽을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다시 한 번 갈등에 시달리는 세상에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