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

2장 배제 - 가인의 공격

평화숲 2013. 1. 30. 06:20

 

...가인의 공격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창4:1~16) 만큼 배제의 구조와 역동, 힘을 잘 설명한 성경 본문은 없다. ... 모든 인간이 이런 식으로 타자를 대하는 경향이 있음을 예시하는 이야기다. 「창세부터 감취진 것들」에서 르네 지라르는, 가해자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가해자의 관점을 취하는 전형적인 신화적 텍스트와 달리,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희생자의 관점을 취해 가해자를 정죄하고 있음을 깨달을 때 이 이야기의 온전한 의미가 드러난다고 주장했다. .... 원 역사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그들'의 이야기는, 곧 살인을 저지르는 '우리'의 이야기다. 가인은 '그들'인 동시에 '우리'다. 자신의 형제자매와의 관계에서 모든 아담과 하와의 아들딸이 가인이다. 이 이야기가 희생자의 관점을 취한 것은 지라르가 주장하듯이 가해자를 정죄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희생자가 가해자로 돌변하는 경향을 깨뜨리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의 위대함은, 가해자에 대해 분명한 심판과 '무고한' 희생자의 분노로부터 그를 보호하고자 하는 단호한 의지를 결합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질문하시며 가차 없이 그를 정죄하시는 동시에 은혜롭게 그에게 보호의 표지를 주셨다.

외형적으로 가인과 아벨은 똑같다. 그들은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고, 똑같이 존경할 만한 직업에 종사했다. 양을 치는 사람과 땅을 가는 사람으로서 상호보완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다. .. 그러나 외형적 동등성은, 둘 사이의 관계를 처음부터 규정했던 불균등을 은폐하는 동시에 고조시킨다. 어머니는 맏아들이 태어났을 때 자랑스럽고 기쁜 마음으로 "내가 여호화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외쳤으며, 그 벅찬 기쁨은 맏아들의 이름에 새겨 넣었다. 가인은 '생산하다' '낳다'라는 뜻을 지닌 영예로운 이름이다. 둘째의 탄생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에게는 열등한 존재라는 뜻이 담긴 이름이 주어진다. 아벨은 '숨' '증기' '덧없음' '무가치함' '없음'이라는 뜻이다. 가인은 큰 땅을 가진 부유한 농부였던 반면, 아벨은 얼마 되지 않은 양떼를 먹일 수 있을 정도로 불과한 작고 척박한 땅을 가진 가난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똑같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제물을 가져왔지만, '형'인 가인은 그저 '땅의 소산'을 바친 반면 가난한 아벨은 가장 좋은 동물의 가장 좋은 부분을 가져왔다. 하나님은 그 차이를 아시고 가인의 제물이 아니라 아벨의 제물을 존중하셨다. 하나님 앞에서 둘다 쉽게 동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두 사람 사이의 가장 철젛나 불평등이 드러난다. 하나님은 이 불평등을 인정하심으로써 하와와 가인이 세워 놓은 가인과 아벨 사이의 '불평등의 질서'를 역전시키셨다. 즉, 아벨은 하나님께 존중받았고, 가인은 그렇지 못했다. 이렇게 뒤바뀌어 버린 상황에서 가인이 하나님께 보인 반응이 이 이야기의 핵심을 이룬다.

맨 처음 눈에 띄는 이 이야기의 문제점은, 형식적 평등과 동질감(형제는 상호보완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다)이다. 그에 반해 두 사람은 첫째와 둘째로, 부자와 가난한 사람으로, 영광을 받은 사람과 경멸당한 사람으로, 존중받은 사람과 무시당한 사람으로 불가피하게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모든 인간관계에는 평등과 차이 사이의 긴장으로 가득하며, 바로 그런 맥락에서 자아와 타자 사이의 관계를 협상해 나가야만 한다. ... 인간의 일은 실패의 위험을 동반히기 때문에, 차이에 대해 불가피하게 가치의 꼬리표가 붙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궁극적인 심판자에게 인정을 받을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자아는 그 정체성을 유지하려 하고 타자를 희생시킴으로써 자기를 내세우려는 투쟁에 임하게 된다. 이런 경향은 배제의 땅으로 나아가는 문을 연다.

첫 번째 감정은 시기심이었다. 분명 '보잘것 없는 사람'이었던 아벨이 존중 받은 반면, 분명 '중요한 사람'이었던 가인은 무시를 당했다. 분노가 찾아왔다. 하나님과 아벨을 향한 '격렬한 반대의 감정'이었다. 그 감정이 하나님을 향했던 이유는 하나님이 가인을 불공평하게 대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가인의 위대함을 경시하셨기 때문이다. ... 분노는 배제라는 사슬의 첫 고리다. 그는 하나님을 우러러보는 대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단절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대신, 하나님의 경고에 귀를 닫았다. 들로 나가자고 제안함으로써 공동체를 추방해 공동체가 자신의 행동에 대해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아우 아벨을 쳐 죽임"으로써 궁극적인 배제의 행동을 저질렀다. ..

가인은 분노에 굴복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경고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는 죄의 논리가 선을 행하라는 명령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 점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죄의 논리는 처음부터 선을 행해야 할 의무를 저버리기 위한 바로 그 목적을 위해 고안되었기 때문이다. .... 가인의 실패가 보여 주듯이 그것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죄에 관한 지식으로는 죄를 극복할 수 없다는 지식조차도 충분하지 않다. 율법을 주시고 조언을 해주시는 분에 불과한 하나님은 무력하다. 죄는 앎의 실패가 아니라 의지의 그릇된 방향 설정이며, 그 자체로 대항하는 지식을 만들어 낸다. ...

형제를 갖기 위해서 형제가 되어야 하고, 형제를 '지켜야' 한다. 형제를 가지고 있었지만 형제가 아니였던 가인, '지켜야'했던 형제를 살해한 가인에게 소망이 존재하는가? 이 이야기에서 소망은 하나님과 가인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 속에 존재한다. 악을 행하기 전 하나님의 개입-"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냐?"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악행 이후 하나님의 두 번째 개입-"네 아우 아벨이 어디있느냐?"- 역시 많은 것을 이룬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 하나님의 세번째 개입은 분노가 담긴 심판의 말씀이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계속 가인에게 질문을 던지신 이유를 깨닫는다. 야웨, 즉 압제당하는 이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는 그 하나님은 살인이 다가오는 것을 보시고 그것에 대해 경고하셨다. 괴롭힘을 당하고 비인간적인 취급을 당하는 이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은 무고한 피가 외치는 소리를 들으시고 악을 행한 자를 심판하셨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물음이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했다. 즉 , 가인의 반응을 이끌어 내셨다. 가인이 판결이 가혹함에 대해 불평한 것인지, 자신의 범죄의 중함을 인정한 것인지,아니면 둘 다인지에 관해 주석가들의 입장이 갈린다. 어떤 경우이든, 가인은 자신의 악행 때문에 자신이 추방되어 갈 혼돈으로 가득한 배제의 땅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를 지적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책임을 인정했다. 하나님의 네번째, 다섯번째 개입은 책임의 인정과 그가 받을 처벌의 무게에 대한 응답이었다. 배제의 땅에서 "주님은 가인에게 표를 주셨다" 이것은 그를 행악자로 낙인찍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제 잠재적인 희생자가 된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이 "표"는, 지라르가 주장했듯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모방적 폭력"으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한 구별 체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구별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뒷받침하는 은총이다. 가인의 충분하지 않은 제물을 존중하지 않으신 바로 그 하나님이, 이제 목숨이 위태로워진 살인자에게 자비를 베푸셨다. 하나님은 가인 자신이 시작한 배제의 순환에 가인을 내어 주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표를 받은 가인은 비록 "하나님 앞을 떠나서" 먼 곳에 정착했을지라도 하나님께 속했고 그분의 보호를 받았다.

 

우리는 원 역사에서 가인이 보호받았음을 보았다. 성 금요일에 우리는 그가 속량받는 것을 발견한다. 가인은 포용의 정반대를 실천했고 그의 몸은 "타자의 몸을 죽일... 의도로 그것에 정면으로 맞섰지만",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께로 이끌릴 것이며, 그분은 그를 끌어안으실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포옹이 가인의 시기와 증오, 죽이고자 하는 욕망을 치유하실까? 데 우나무노이 「아벨 산체스」에서 호아킨 모네그로는 자신의 아내이며 성인이었던 안토니아에게, 자신이 그녀를 사알하지 않기 때문에 그녀는 그를 치유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가인에 대해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만약 그가 자신을 끌어안으셨던 그분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포옹은 그를 치유할 수 없을 것이다. "자기 아우를 살해한" 반 모범인 가인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걷기 시작할 때에만 "우리를 ㅜ이해 자기 목숨을 버리신" 모범이시니 그리스도에 의해 치유받을 수 있을 것이다. (참고 요일 3: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