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

3. 포용 - 타자를 위한 공간 : 십자가, 삼위일체, 성만찬

평화숲 2013. 2. 28. 06:43

타자를 위한 공간 : 십자가, 삼위일체, 성만찬

 

'용서'는 십자가의 의미를 상당 부분 요약해 준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인간의 죄가 얼마나 파괴적인지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동시에 드러내는 궁극적 상징이다. 예수님이 실제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지 않으셨을지도 모르지만, 이 기도는 그분의 수난 이야기에, 또한 결국 십자가에 이르는 그분의 삶 전체에 지울 수 없도록 새겨져 있다. ...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은, 한 무고한 사람의 수동적인 고난을 넘어, 고문당하는 영혼과 찢겨진 몸을 가해자를 위한 용서의 기도로 바치셨던 사건이다. 용서가 자체가 고통이다. 용서할 때 나는 권리를 침해당하는 고통을 받을 뿐 아니라, 엄격한 보상적 정의에 대한 정당한 요구를 억누른 것이다. ..

용서는 필요핟. 하지만 용서로 충분한가? 용서는 배제와 포용 사이의 경계선이다. 그것은 배제가 만든 상처를 치유하며 적의라는 분리하는 담을 허문다. 그러나 용서를 하더라도 사람들 사이의 거리, 즉 중립성의 공간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공간에서 그들은 각자의 길을 갈 수도 있고, 서로의 품에 안겨서 깨어진 사귐을 회복할 수도 있다. .."친구가 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불의가 자행되었다. 더불어 살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피가 쏟아졌다" 이런 말들은 갈등으로 무너진 지역에서 흔히 들을 수 있다. 선명한 선이 '그들'과 '우리'를 분리시킨다. '우리'라는 말에 '그들'을 포함시키지 않을 것이다. .. 그러나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은 아직 평화가 아니다. 평화란 단순히 접촉의 부재에 의해 지탱되는 적대감의 부재를 훨씬 넘어서며, 전에는 원수였던 사람들 사이의 사귐을 뜻한다.

..십자가의 핵심에는, 타자가 적으로 남아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며 자신 안에 가해자가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겠다는 그리스도의 태도가 자리잡고 있다. .. 십자가는 인류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 하나님이 자신을 내어 주신 사건이다. .... '용서는, 그리스도와 죄를 범한 타자사이의 관계의 절정이 아니다. 그것은 포옹에 이르는 통로다. 십자가에 달리신 이는 두 팔을 벌리고 계신다. 하나님은 자신 안에 공간을 마련해 두고 원수에게 들어오라고 초대하신다. ... 이런 십자가의 약함과 순진함은, 비록 스캔들이 되기는 하지만, 니체가 [안티크리스티]에서 말한 "적대감을 느끼지 못하는 무능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적대감의 결과들을 거부하는, 적대감을 향한 적대감을 드러낸다. 원수의 폭력과 거부의 행윌르 모방하는 대신, 가해자에 의해 규정되기를 거부한 희생자 그리스도는 원수를 용서하고 자신 안에 그들을 위한 공간을 만드신다. ... 가해자를 끌어안겠다고 제안하심으로써 그분은 애초에 가해자가 저지른 잘못과,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많은 희생자가 저지르는 잘못 모두를 심판하신다. 적대감을 향한 적대감은, 희생자와 가해자 사이의 관계를 변화시킨다. 반면 적대감은 그 관계를 그저 역전시킬 뿐이며, 적대감을 느끼지 못하는 무능함은 그 관계를 건드리지 않은 채 그대로 내버려 둘 뿐이다. ...

로완 윌리엄스의 말처럼, "성 금요일과 성 토요일의 사건을 통해 보여 주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기 비우심은 하나님의 본성의 우연한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 속으로 옮겨진 삼위일체의 삶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삼위일체 신학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물들지 않은 본래의 '삼위일체의 삶'은 무엇인지, 어떻게 그것이 타자와 우리의 관계를 규정해야 하는지 묻게 한다.

 

 먼저 그리스도의 수난이 보여 주는 두 가지 차원에 주목하라. 그것은 인간의 적대감을 극복하는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과, 소외된 인류를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 안에 공간을 만드신 것이다. 자신을 내어 주는 것과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은 삼위일체의 내적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두 요소다.

...페리코레시스-나는 '상호 내재성'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라는 관념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은 순수한 정체성으로 후퇴하기를 거부하는 데 성공하는가에 달려 있다. 삼위일체의 위격을 관계로 보는 아우구스티누스적·토마스주의적 이해에 입각해, 요제프 라칭거는 위격은 순수한 관계 안에 존재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위격을 관계다"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요7:16.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에 기대어, 라칭거는 성자 안에는 "오직 그분만 독점하는 속성은 하나도 없고, 담을 만들어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사유지 같은 것도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 그 대신, 그분의 존재 전체가 자신을 완벽히 투명하게 만드심으로써 그분을 통해 성부를 볼 수 있게 한다고 주장한다. ..'위격'과 '관계'를 동일시하기보다는, 위르겐 몰트만처럼 그들을 '상호 관계 속에서'이해하는 것이 낫다. 그렇게 본다면 성자는 이제 성부를 위해 완벽히 투명하지 않고, 성자와 성부 모두 서로의 '안'에 계시는 것으로 이해된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 이처럼 사랑으로부터 나온 상호 내재성-"나는 그저 내가 아니며, 타자 역시 나에게 속해 있다"-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신적 위격의 정체성과 관계를 설명해준다. ..삼위일체의 자기 폐쇄적이지 않은 정체성을 지탱해 주는 바로 그 사랑이 '하나님 안에' 인류를 위한 공간을 마련한다. 그러나 인류는 하나님께 그저 타자가 아니라 원수가 된 사랑받는 타자다. 하나님이 원수를 끌어안으려 하실 때의 결과는 십자가다. 하나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내어 주시며, 상호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위격들의 춤추는 원이 원수를 위해 열린다. 수난의 고통 속에서 짧은 순간 동안 춤추는 움직임이 멈추고 틈이 생겨서 죄인인 인류가 그 춤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서로를 사랑하시는 바로 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영원한 포용 속에 우리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신 하나님의 위격들이, 타자인 우리-원수인 우리-를 끌어안으신다. 성만찬은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공간을 만드시고 우리를 그곳으로 초대해 들이신' 것을 기념하는 예전적 시간이다. .... 하나님의 포용을 받은 우리는 우리 안에 다른 이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고 그들을-심이저 우리의 원수까지도- 초대해 들여야 한다. 성만찬을 행할 때 우리는 바로 이것을 재연한다. 그리스도의 찢긴 몸과 흘린 피를 받으면서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 고통받음으로써 받아들이신 모든 이를 받아들인다. .... 성만찬은 자아를 타자에게 내어 주고 타자를 자아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해 이루신 일이며 그리고 우리 역시 행하도록 요청받는 그 일을 경축하는 것이다. 성만찬을 통해 우리는 갈등으로 얼룩진 이 세상에서 그런 내어줌과 용납함을 실행하도록 능력을 부여받는다.

정교회의 예전적 삶의 절정, '축제 중의 축제'인 부활절 아침 기도의 마지막 부분, 성찬 예배의 시작 직전에 찬양대는 이런 노래를 부른다.

 

아름다움의 부활절

주님의 부활절

모든 영광을 받기에 합당한 부활절이 우리에게 밝았다.

부활절!

기쁘게 우리 서로 끌어안자.

오 부활절, 고통에 대한 속전.

 

그리고, "성부, 성자, 성령께 지금부터 영원까지 세세무궁토록"이라고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활을 돌린 후 찬양대는 다시 이렇게 노래한다.

 

이 날은 부활의 날이네.

이 축제를 통해 우리 마음이 밝아지네.

우리가 서로를 끌어안자.

우리를 미워하는 이들까지도 '형제'라고 부르고

부활의 능력으로 모두를 용서하자.

 

...그들이 포용해야 할 타자는 교회 공동체 안의 '형제'와 '자매'에 국한되지 않고 외부의 원수-"우리를 미워하는 이들"과 "모두"-까지도 포함된다. 우리가 이들을 용서하고 '헝제'와 '자매'라고 부를 때 그들도 이 포용 안으로 받아들여진다.

 

 

 

 

 

 

 

 

 

 

 

인류는 하나님께 그저 타자가 아니라 원수가 된 사랑받는 타자다.

자식은 그저 타자가 아니라, 원수가 된 사랑받는 타자다.

자식을 위한 공간이 항상 있다. 그를 위해 내어 주는 사랑과 용서가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