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포옹- 계약, 언약, 포옹
-계약, 언약, 포옹
일종의 '도박'-'은총'에 근거한 도박-이 없다면 참된 인간의 삶은 불가능할 것이다. .... 우리는 포용의 무모한 '은총'을 어떤 형태든 상호 구속적인 '율법'으로 보충해야 한다. 혹은 사회적 관계를 규제하는 '율법'에 포용의 '은총'을 끼워 넣어 '율법'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것을 안에서부터 계속 변회시켜 나가야 한다. 이제 나는 예측 가능성을 확보하려고 하는 현대 사회라는 맥락에서, 사회적 삶에서의 규제와 관련된 두 가지 주요한 은유-'계약'과 '언약-에 대해 논할 것이다. 그런 다음, 앞서 제시한 포옹에 관한 성찰이 사회적 언약에 대한 일반화된 이해를 어떻게 풍성하게 할 수 있는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 정치적 자유주의는 삶을 본질적으로 개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활동이라고 이해하며, '계약'이 사회적 삶의 중심 은유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들은 피해에 대한 두려움과 안락함에 대한 욕망 때문에 그들에게 "안전과 이익"을 제공하는 "계약"을 맺는다. ... 계약의 중요한 특징 세가지에 관해 생각해보라. 첫째, 계약은 과업 지향적이다. 둘째, 계약의 특징은 제한된 헌신이다. 필립 셀즈닉은 계약관계의 이러한 특징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계약의 항복과 조건을 구체적으로 명기하고, 불이행으로 인한 비용을 미리 계산한다. 그뿐 아니라 몇몇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도덕적 법적 의무도 합의를 반드시 이해하게 만들지는 못하며, 정당하지 않은 불이행이 발생할 경우 입게 된 손실을 보상해 줄 뿐이다.
계약은 그것이 명시적 혹은 암묵적으로 진술한 것에 대해서만 강제력을 지닌다.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다.
셋째, 계약은 엄밀하게 상호적이다. 양측이 동의해야만 양측 모두에게 구속력이 있다.
계약의 엄격한 상호성과 제한된 헌신, 과업 지향성을 감안할 때 왜 계약이 현대 사회에서 사회적 관계의 핵심 은유로 떠올랐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 계약은 관계를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만들지만, 변경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노예처럼 예속시키지 않고도 계약을 맺을 수 있다. 자신을 분리된 개체로 바라보며, 가장 신성한 선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것을 얼마나 오래 원하는지를 결정할 자유라고 생각하는 사회적 행위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에 꼭 맞게 설계된 계약은, 사람들의 참여를 안정화하는 동시에 유동성을 유지하게 해준다. ... 하지만, '계약'이 사회적 삶 전체에 대한 핵심 은유로서 과연 효과적일까? 그것은 우리 삶의 중요한 한 부분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 가에 관한 '서술적 규범' 이상의 무언가를 제공할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전망, 즉 좋은 삶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계약적 사회 모형에서, 계약의 세 가지 두드러진 특징은 인간의 삶을 잘못 이해하는 세 가지 중요한 방식일 뿐이다. 첫째, 인간은 자신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만 서로 관계를 맺는 '자율적 개인'이 아니다. .. 그들 사이의 기능적 관계는, '비합리적'이며 구체적으로 명시할 수 없는 정서적 유대에 의해 지탱된다. 둘째, 여러 차원에서 서로에 대해 관여하는 경우는 명확히 명시된 항목과 조건에 의해 제한 될 수 없다. 사람들은 단지 상호적 유용성만이 아니라 공동의 '운명'과 같은 것에 의해서도 구속을 받는다. 마지막으로, 이웃에 대해 이행해야 할 의무 중에는 이웃이 나에 대해 상응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해서 무효화되지 않는 것도 있다. 우리의 관계는 엄격하게 상호적이지는 않다. ... 사회적 관계에 대한 핵심적 은유로서 '계약'은 심각한 결점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사외 안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들의 삶은 서로 뒤엉켜 있고, 그들의 상호작용은 도덕적인 의미를 지닌기 때문이다. ... 셀즈닉은 [도덕적 공동체]에서 '언약'을 '계약'과 대조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언약]은 파기할 수 없는 헌신과 지속적인 관계를 암시한다. 유대는 상대적으로 무조건적이며, 상대적으로 해체 불가능하다.... 유대는 제한이 없으며, 광범위한 의무를 상정하며, 인간과 집단 전체를 포함시키고, 두드러진 지위를 만들어 낸다.
"공동체주의적 자유주의자"인 셀즈닉은 근대적 "자율적 개인"도 "상대적으로 무조건적인" 유대와 사회적 삶의 "도덕적 질서"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그 '언약'이 두 가지 모두를 고수할 수 있게 해준다고 주장한다. 언약에는 자율과 소속감, 개인적 참여와 사회 안에 자리잡고 있는 개인이 모두 공존한다. "언약"은 "자발성과 동의라는 핵심 요소"를 아우르며, "관계의 본질과 역사로부터 도출되며" 결코 "미리 구체적으로 명시할" 수 없는 의무를 만들어 낸다. 제한적이며 상호적인 참여를 규정하는 계약과 달리, 언약은 끝이 열려 있으며 도덕적으로 규정된 관계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언약이 구축하는 '관계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종류이 공통적 역사를 만들어 내는가?..... 무엇이 그 언약 자체를 도덕적으로 구축해야 하는가 하는 결정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셀즈닉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라는 핵심적 "언약적 전제"로 삼는다. 그러나 그는 사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신앙의 도약" "자기 규정적 헌신" "헌법 제정의 모험"을 통해 이 원칙에 도달한다. 다시 말해, 언약 이론이 "도덕적 질서에 관한 이론"으로 유효한 까닭은, 그가 사회적 관계의 형식으로서의 언약으라는 구조에 어떤 "자명한 원칙"에 대한 헌신을 덧붙였기 때문이다. ...
언약의 도덕적 기반은 언약을 만드신 하나님에 의해 제공된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당사자로서 인간의 의무는 언약 신학자들이 보편적 구속력을 지닌다고 간주한 '도덕법', 즉 십계명에 표현되어 있다. .. ... 가정과 이웃에서 국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개별적인 인간의 언약은 인류 전체를 아우르는 포괄적 언약에 종속되어야 하며, 본질적 가치-즉, 연대성 아넹서 보편적으로 "서로 붙잡는" 태도-에 의해 통제된다. .....
"언약 혹은 리바이던"이라는 글에서 위르겐 몰트만은 초기의 언약적 "정치 신학자들"을 따르면 하나님 아래서 언약에 의해 연합한 사람들이 자유를 얻었고, 그 때문에 "그 거대한 리바이어던"-전체적인 정부-에 저항할 수 있음을 강조한 바 있다. .... 나는 헌신의 성격과 공동체가 번영하는 조건에 관심을 기울일 생각이다. .....
..토머스 홉스는 [리바이던]에서 국민이 "상호 간에 맺은 언약에 의해" "권위"를 국가에 이전하고, 그렇게 해서 " 이 거대한 리바이어던(혹은 더 경건하게 말하자면.. 죽을 운명의 신)"을 탄생시킨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 아래에서 살면서도 우리의 평화와 보홀르 리바이어던에게 맡기고 있다." "만인이 만인과" 더불어 만장일치로 권력을 이전하는 것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끈질긴 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필수적이다. 자기들끼리 언약을 만들고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은 리바이어던-성경의 증언에 따르면 이것은 누두와도 언약을 맺지 않는다(욥41:4)-이 필요하다. 그렇게 해서 리바이어던은 자신의 권력과 힘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 "만인의 의지"를 만들어 내고, 이로써 "국내의 평화와 국외의 적에 대항하는 상호 원조"를 보장해 준다. 이렇게 부정적 인간론이라는 어둡고 혼란스러운 물로부터 리바이어던이 출현한다. ....
..인간은 언제나 이미 언약을 깨뜨린 존재로서 언제나 이미 언약 안에 있다. ... 사회적 문제에 관한 신학적 성찰에서, 열두 지파 연합 전통의 기초가 되는 '본래의 언약'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정치 사상을 위한 자료로서 아직까지도 거의 완벽히 무시다앟고 있는 '새 언약'이다. ...
첫째, 새 언약은 언약을 깨뜨리는 끈질긴 패턴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진 것이다. ... .. ,언약에 이미 속해 있지만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사회적 역학으로 이해해야 한다. 둘째, 새 언약은 '돌판'에 쓰인 언약의 약속을 어떻게 '마음'에 새겨 놓을 수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핵심적 정치적 과제는, 사람들에게 언약을 맺고 지킴으로써 폭군에게 저항하라고 설득하는 것을 넘어서, 자신이 세운 언약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사람들을 길러 내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서로 배신하고 서로에게 군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학자가 새 언약을 사회 문제에 대해 신학적 성찰의 핵심으로 삼는다는 것은, 십자가와 언약 사이의 관계를 탐구한다는 뜻이다. 십자가를 토앻 우리는 인류가 깨뜨린 언약을 갱신하기 위해 하나님이 무슨 일을 행하셨는지를 깨닫는다. 앞의 논의(타자를 위한 공간:십자가, 삼위일체, 성만찬)를 끌어와서 나는 십자가를 통해 언약을 어떻게 갱신-부서지기 쉬운 언약을 강화하고, 깨어진 언약을 고치고, 언약이 완전히 폐기되는 것을 막는다는 삼중적 의미의 갱신-할 것인가에 관해 그리고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에 관해 간략히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십자가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아 안에 인류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심으로써 언약을 갱신하신다. 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벌린 두 팔은, 하나님이 타자-인류-가 없는 하나님이 되기를 원치 않으시며 인류를 끌어안기 위해 인류의 폭력을 당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는 상징이다. 이처럼 하나님이 '자신 안에 공간을 마련하셨다'는 것은 사회적 언약에 어떤 함의를 갖는가?
.. 계약과 달리 언약은 상호적 유용성의 관계가 아니라 도덕적 헌신의 관계라고 주장했다. .. 언약 당사자들은, 오래 지속되는 관계의 틀 안에서 서로에게 특정한 의무를 지니는, 단순한 도덕적 주체가 아니다. ... 오히려 각 사람의 정체성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낟. 타자의 타자성이 각 사람의 정체성 안으로 침투한다.
이런 상황에서 언약을 갱신한다는 것은 "한쪽의 관점을 초월해 다른 쪽의 보완적 경향을 고려하는" 것을 뜻한다. 더 나아가 언약을 갱신한다는 것은 타자의 정체성 변화에 주의를 기울이고, 변화하는 타자를 위해 자아 안에 공간을 마련하고, 타자의 유동적 정체성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기꺼이 재협상한다는 것을 뜻한다. 언약의 각 당사자는 자신의 태도와 정체성을 상대편의 태도와 정체성에 대해 상호 보완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한 상보성과 역동적 정체성의 지속적인 재조정이 없다면, 도덕적 구속력만으로는 다원주의적 맥락에서 언약에 대한 압력을 충분히 다 막아 낼 수 없을 것이며, 결국 리바이어던이 되돌아 올 수 있는 문이 열릴 것이다. 개인과 집단 사이에서 언약을 지탱하고 갱신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자아 안에 타자를 위한 공간을 만들고" 타자의 존재에 비추어 자아를 재조정해야 한다.
둘째, 언약을 갱신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내어 주어야 한다. 십자가에서 새 언약은 "피로" 세워졌다. 새 언약의 피는, 언약 당사자 사이에 상상을 통한 피의 관계를 세우고 극서을 어겼을 때의 결과를 극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제3자(동물)가 흘린 피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라. ...
십자가의 이야기는 언약을 어겼기 때문에 "죽으셨던" 하나님의 '자기모순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수도 없고 하실 의도도 없으셨던 일을 행하신 놀라운 이야기, 너무나도 인간적인 언약의 상대편이 언약을 깨뜨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죽으셨던 이야기다. .... 그것은 자기를 내어 준느 피, 심지어는 자기 희생의 피다. 언약의 한쪽 당사자가 언약을 어겼고, 다른 쪽은 언약의 불이행으로 고통을 당한다. 왜냐하면 한쪽이 언약을 불이행해도 그 언약을 폐기되지 않기 때문이다. .. 깨어진 언약을 고치는 데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는, 언약이 깨질 때눈 언제나 불이행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것이 누구의 잘못인지에 관해 심각한 불일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부분적으로는 잘못을 인정할 때 져야 할 책임을 축소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언약을 깨뜨린 사람은 자신이 그것을 깨뜨렸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 셋째, 새 언약은 영원하다. 십자가에 하나님이 자기를 내어 주신 결과로 언약은 '영원성'을 얻는다. 이것은 다시 언약을 깨뜨린 언약 당사자를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의 '무능력'에 의존한다.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하시는 호세아서의 하나님은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라고 반어적으로 물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의 줄"로 이스라엘과 단단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참여는 철회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언약은 파괴할 수 없다. 그와 비슷하게, 모든 특정한 정치적 언약은 "상대적으로 무조건적"이기 때문에 폐기될 수 있지만, 더 광범위한 사회적 언약은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이며 따라서 '영원하다' 그 언약을 어길 수는 있지만, 그것을 폐기할 수는 없다. ...
.. 이것은 화해라는 관념과, 역동적이며 상호적으로 조건 지워지는 정체성이라는 관념을 결합하고자 하는 은유다. 새 언약이란 곧 계속해서 언약을 깨뜨리는 인류를 하나님이 끌어안으신다는 것이다. 사회적인 측면에서 볼 때 새 언약(포용)의 관점에서 사회적 관계를 성찰한다는 것은, 내가 앞서 이야기한 옛 언약의 관점에서의 성찰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보충한다는 뜻이다. 둘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포용은 언약의 내적 양상이며, 언약은 포용의 외적 양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