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

참자아 찾기 - 파커 파머

평화숲 2013. 12. 8. 06:59

온전한 삶으로서의 여행

 

참자아 찾기

 

1. 참아자에 대한 의문. 59쪽

 

건강한 커뮤니티는 사람들이 참자아에 대한 의식을 확장하도록 돕는다. 커뮤니티 안에서만 자아를 주고받고, 귀 기울이며 말하고, 존재하고 행동하는 자연스러운 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읻. 그러나 커뮤니티가 약해지고 사람들이 서로 접촉하지 않으면, 자아는 위축되고 우리 자신과의 접촉도 약해진다. 우리가 관계라는 망 안에서 자신일 수 있는 기회를 잃으면, 우리는 관계를 더욱 분열시키고 내면의 공허함이라는 유행병을 퍼트리는 행동을 계속함으로써 결국 자신의 자아감마저 사라지게 한다.

 

확실히 이기적인 행동들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들은 공허한 자아에서 생겨난다. 다른 사람들을 해침으로써, 또는 우리 자신을 해쳐 우리를 걱정하는 이들을 슬프게 함으로써 공허함을 채우려 하는 것이다.

우리가 참자아에 뿌리박고 있을 때 우리 자신과 우리와 맞닿아 있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해 생명을 주는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참자아를 보살피는 모든 행동은 결국 세상을 위한 선물인 것이다.

 

 

2. 분리된 삶의 이야기들   

 

60쪽

우리는 분리되지 않고, 부족한 것 없이, 온전한 채로 이 세상에 온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내면에 있는 것들을 보호하려 하거나 주위 사람들을 속이려 하면서 내면과 바깥의 삶 사이에 벽을 세운다. 그리고 우리 대부분은 분리된 삶에서 비롯된 고통을 참기 어려워졌을 때에야 비로소 '분리되지 않은' 삶을 찾아 내적인 여행을 시작한다.

 

 

그 띠의 한쪽 면이 당신의 바깥, 또는 무대 위 삶을 나타낸다고 상상해보자. 여기서는 우리가 세상과 상호작용할 때 우리의 바람과 걱정을 나타내는 '비치다, 영향을 미치다. 충격을 주다'와 같은 낱말들이 우리의 경험을 드러내준다. 누가 지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가? 내가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내가 어떻게 보일 것인가?

띠의 다른 쪽은 당신의 내면, 또는 무대 뒤 삶을 나타낸다. 여기에서 쓰이는 낱말들은 '생각, 직관, 느낌, 가치, 믿음'과 같은 좀 덜 불안하고 더 반성적인 낱말들이고, 좀 더 깊이 들어가면 그것들의 원천을 가리키기 위해 '마음, 심정, 영, 참자아, 정신, 도'와 같은 낱말들을 선택하게 된다.

 

64쪽

무대 위에서 내가 맡은 역할을 하는 동안 내 참자아는 내 안의 가장 깊은 가치와 믿음, 그 부서지기 쉬운 희망과 열망을 세상이 부숴버릴까 두려워 무대 뒤에 숨어 있었다. 내가 교육을 받을 수록 학교는 더욱더 불안한 곳이 되었다.

 

처음에 나는 세상의 공격으로부터 내 취약한 자아를 숨기기 위해 벽이 필요했다. 그러나 낯선 이들에게 감춰진 자아는 곧 가까운 이들에게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직장에서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튼튼하게 둘러쳤던 벽은 가족과 친구들의 믿음에서도 쉽사리 부서지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직업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적인 삶에서도 참자아를 계속 숨기기 시작했다. 그 다음에는, 어쩔 수 없이, 나 자신으로부터도 내 진실을 감추기 시작했다.

바로 여기에 분리된 삶의 역설이 존재한다. 벽 뒤에서 살아라! 그러면 네가 숨기려는 참자아가 너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벽과 그 바깥 세상이 네가 아는 전부가 된다. 결국 너는 벽이 있다는 것조차 잊는다.

그리고 벽 뒤에 숨은 그것은 '너'라고 부르는 또 다른 누군가다.

벽 뒤에서 살다보면 적어도 세 가지 결과가 발생한다.

첫째, 내면의 빛이 우리가 세상에서 하는 일을 비출 수 없다.

나는 젊은 교수였을 때, 종신재직제도의 압력에 굴복하여 참자아를 벽으로 둘러쌌다. 그건 교사의 소명을 저버린다는 걸 뜻했다.

둘째, 우리가 벽 뒤에서 살면 세상의 빛이 우리 내면의 어둠을 비출수 없다.

사실상 우리가 '저 바깥에서' 보는 건 그저 깜깜한 어둠뿐이다. 우리 스스로 얼마나 많은 어둠을 자아내는지는 알지 못한 채로 말이다. 젊은 시절 나는 그 벽때문에 나 자신의 어둠을 다른 이들에게로 던져버렸다. 아울러 그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셋째, 우리가 벽 뒤에서 살면 우리와 가까운 이들은 우리의 무대 위 모습과 무대 뒤 실제 모습 사이의 간극을 알아차리기 시작한다.

그들은 우리의 이중성을 불신하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와 거리를 둔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좀 더 분명하게 보는 기회를 줄 수 있는 관계들이 우리의 삶에서 사라진다. 우리에게 빛을 보도록 도움을 줄 수 있었던 바로 그 사람들이 그림자의 힘에 의해 추방되고 결국 우리는 사방이 자기 기준으로 막혀 있는 지옥에서 살게 된다.

 

3. 뫼비우스 띠 위의 삶

67쪽

어떻게 해야 벽 뒤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영혼과 역할 사이의 벽이 우리의 깨달음을 도울 수 있는 외부의 자극을 모두 차단했을 때, 우리가 세상과 참자아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분리된 삶은 병든 삶이고, 그래서 항상 증후군이 생겨난다.

 

우리는 3단계에서 우리의 가치와 믿음 주위에 무대 위 삶을 다시 배치함으로써 통합을 이룰 수 있다. 당신이 벽으로 상상한 그 종이 띠를 당시 들고 두 끝을 이어보라. 그림2. 당신이 만든 그 원은 3단계를 가동시키는 다음과 같은 열명을 나타낸다. "나는 내면의 진실을 중심으로하여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고, 그 관계에서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 결정하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중시 잡힌' 열망으로, '중심 잡힌'이란 말은 최근 수십 년 간 영적 문학 작품에서 가장 자주 사용한 낱말인 듯싶다. 바깥의 삶을 내면의 진실에 맞추려는 욕망은 우리를 통합으로 한 걸음 나아가게 한다. 그러나 이 시각적인 보조 도구가 직접적으로 보여주듯, 이 3단계는 그림자의 면을 동시에 지닌다. 종이 고리를 수평으로 들고, 그것을 둥글게 친 울타리라고 생각해보라. 그러면 천막들로 이루어진 둥근 야영지나, 경비원들이 출입을 감시하는 안전한 주택지, 또 잘 아는 사람들만 환영하는 비밀의 화원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3단계에서 그림자의 면은 우리가 내면의 진실을 자신에게 도전적인 이들이나 사물들을 배제하는 여과기로 이용할 때 생겨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일을 흔히 목격한다. 종교가 공적인 영역에서 삶을 분열시키는 역할을 해서 신자들이 교의에 따라 사람들을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로 나눈다. 우리가 우리의 진실을 이러한 분열을 일으키는 데 이용한다면, 모든 위대한 영적 전통이 요구하는 세상에서 완전히 어긋나게 된다. 이럴 때 3단계의 서클이란 위장된 2단계의 벽에 불과하다.

 

무엇이 우리를 마지막 단계로 데려가는가? 원의 형태로 들고 있는 종이 띠를 다시 잡고 두 끝을 약간 떼어놓은 다음, 한쪽 끝을 반쯤 비틀어 두 끝을 다시 이어보라. 그림3. 방금 당신은 뫼비우스 띠라고 부르는 주목할 만한 형태를 만들었다.

뫼비우스 띠의 역학이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뫼비우스 띠에서는 '안'도 '바깥'도 없고, 분명 두 면이 계속 서로를 만들어 가는 까닭에 '여겨지는 곳'이라는 말을 반복해서 써야 했다.

뫼비우스 띠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우리 내면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계속 밖으로 흘러나가 세상을 이루는 데 일조하고, 우리 바깥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계속 안으로 흘러 들어와 우리의 삶을 형성하는 데 일조한다는 것이다. 뫼비우스 띠는 인생 그 자체와 같다. 여기에서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실재가 존재할 따름이다.

 

우리는 우리의 벽 뒤에서 진실을 감추거나, 아니면 우리에게 맞지 않는 것들을 거르기 위해 진실을 이용한다고 믿으면서 자신을 속이려 들지 모른다. 그러나 알든 모르든,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우리 모두는 늘 뫼비우스 띠 위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숨을 곳이 없다! '저기 바깥에' 있는 것들과 '여기 안에' 있는 것들이 끊임없이 교환하면서 우리는 조금씩 더 나아지기도 하고, 조금씩 더 나빠지기도 하는 현실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내면의 삶과 바깥 세상,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 개인적인 측면과 전문가적 측면을 분리하는 문화에서는 대부분 사람들이 이 단순한 진리조차 무시한다.

 

나는 우리의 인샌이 뫼비우스 띠와 같다는 걸 알기에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으로 대응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여러분은 다른 누구를 그 교실에 드려보내겠습니까? 여러분이 교실 안에 있다면 여러분의 가치도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말을 믿지 못한다면 학생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입니다. 학생들은 교수가 무엇을 믿는지 '알아차리는 데' 달인들입니다. 그것은 학생들이 생존본능처럼 갖추고 있는 능력입니다.!" 라고. 교수, 정치가, 부모들이 자신이 누구인지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할 때, 그들은 스스로를 속이고 다른 이들을 위협하여 서로 신뢰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어 낸다.

 

무대 위와 무대 뒤 삶의 관계 4단계에서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다. 뫼비우스 띠 내외면의 상호작용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자신과 다른 이들 모두에게 생명을 주고 함께 창조하는 방식으로 띠 위를 깨어서 걸어가거나, 아니면 위험할 뿐더러 우리의 관계에, 선한 일에, 희망에 종종 죽음을 초래하는 방식으로 졸며 걸어갈 수밖에 없다.

 

모든 위대한 영적 전통들은 우리가 삶의 현실을 상호 창조하고 있음을 일깨워주고자 한다. 그 전통들은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내면에서 바깥세상으로 무엇을 내보내고 있고, 그것이 '저 바깥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세상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고, 그것이 '여기 안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이렇게 우리는 끊임없이 자아와 세상의 진화에 참여하고, 그러면서 순간 순간 생명을 주는 것과 죽음을 초래하는 것 사이에서 선택한다.

이 단계 뫼비우스 띠에서 이르러서야 비로소 우리는 성인으로 타고난 온전성을 발휘하게 된다. 요컨대, 빙 돌아 처음 시작한 곳으로 오게 된다. 다음과 같은 T.S. 엘리엇의 유명한 싯구처럼

 

우리는 탐험을 멈추지 않으리

모든 탐험의 끝은

출발한 곳에 다시 이르러

그곳을 새롭게 알게 할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