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를 용서해주세요” 가해·피해자 갈등 해결 ‘회복적 사법’] (1) 한국판 ‘치유의 기적’ 성공과 좌절 본문
[“우리 아이를 용서해주세요” 가해·피해자 갈등 해결 ‘회복적 사법’] (1) 한국판 ‘치유의 기적’ 성공과 좌절
국민일보입력2009.12.09 18:06'소년범' 주홍글씨 지우는 화해의 문 열려야
지난해 3월 7일 서울 대치동의 한 학원. 최모(15)군은 같은 반 정모군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정군이 자신을 욕하고 다닌다고 생각해 화가 잔뜩 났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일어난 폭행으로 정군의 코뼈가 내려앉았다. 격분한 정군의 아버지는 최군을 경찰에 고소했다.
서울가정법원은 최군의 재범을 막고 정군과 화해시키기 위해 가해자와 피해자가 대화 모임을 갖도록 권유했다. 조정자로 나선 평화여성회 박수선 갈등해결센터장은 6월 30일과 7월 3일 최군과 정군의 아버지를 각각 만나 회복적 사법 제도를 설명했다.

그러나 대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피해자는 물론이고 가해자도 대화가 왜 필요한지 되물었다. 결국 최군은 '소년범'이라는 주홍글씨를 안게 됐다.
우리나라에서 2007년과 지난해에 시범 운영되며 기존 형사사법 체계의 대안으로 주목받았던 회복적 사법 제도가 꽃을 피우지 못한 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시범 운영에서 긍정적인 결과물도 나왔지만 처벌보다 용서를 목적으로 하는 제도는 정착하지 못하고 있다.
◇시범 운영은 성공했는데…=조정 절차는 조정자의 중재 아래 피해자와 가해자(가족 포함)가 모임을 갖고 용서와 화해로 갈등을 해결하자는 취지로 도입됐다. 2007년 모델은 경찰이 검찰에 사건을 송치하기 전 피해자·가해자 대화 모임을 주선해 합의를 이끌어낸 것이었다. 지난해에는 검찰이 기소하면 법원이 피해자·가해자 대화 모임을 주선했다. 순간 실수로 소년범이 된 아이들이 성인 범죄자로 커간다는 점, 재범률이 높다는 점을 고려한 조치였다.
시범 운영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2년에 걸쳐 폭행 절도 등 20건의 소년범죄 사건을 대상으로 대화 모임이 실시됐다. 대부분의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했다. 피해자는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학교생활에 임했다. 조정자로 나섰던 박 센터장은 "수차례 대화 모임으로 아이들은 언제 싸웠느냐는 듯 가까워졌다. 화해와 용서를 배우며 긍정적으로 변했다"고 했다.
사법 체계에 대한 신뢰감도 높아졌다. 법에 대한 신뢰는 재범률 하락으로 이어지는 단초가 됐다. 2년의 시범 운영 과정에서 대화 모임에 참가한 44명 가운데 사법 체계에 대한 신뢰감이 증가했다고 응답한 사람은 23명(52.3%)에 이르렀다. 피해자·가해자 대화 모임을 시행하고 있는 영국 테임스밸리 경찰서는 지난해 "법에 대한 신뢰감 증가로 소년범 재범률이 제도 시행 전보다 25% 감소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갈 길 먼 한국형 회복적 사법=그러나 시범 운영 이후 확대 시행되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치유의 기적'으로 불리며 이목을 끌긴 했지만 기존 사법 제도의 대안으로 뿌리 내리지는 못했던 것이다.
시범 운영에 참여했던 조정자들은 인식 부족을 가장 큰 걸림돌로 꼽았다. 사건 당사자를 대화 자리에 나오게 하는 과정이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피해자는 "가해자와 대화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핀잔을 주기 일쑤였다. 가해자는 "어차피 처벌 받는데 왜 나가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조정 전문가 부족 등 제도 시행의 인프라도 허술했다. 조정자는 깊이 있는 법률 지식과 많은 경험을 바탕으로 대립·반목을 화해·용서로 바꾸는 중추적 역할을 해야 한다. 시범 운영 때 대부분의 사건에 시민단체인 평화여성회가 조정자로 참여했다. 이 단체를 제외하고 피해자와 가해자 간 조정 작업에 투입할 만한 조정자는 거의 없다.
현재 운용되는 우리 사법 체계와의 괴리도 컸다. 회복적 사법은 범죄에 따른 피해자의 심리적 충격 등을 조정을 거쳐 원상회복하는 데 무게중심을 둔다. 우리 사법 체계가 피해자와의 합의 수단으로 경제적 배상만을 인정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제도를 더 이상 유지하기 불가능하다는 평가도 많다. 시범 운영 당시 실무를 맡았던 김은경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청소년범죄센터장은 "결국 우리 사회가 처벌 대신 용서와 화해를 중심에 둔 새로운 사법 체계를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조국현 기자 joj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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