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

죄책감 문화와 수치심 문화는 다른 인간을 만들어 낸다.-제러미 리프킨

평화숲 2013. 10. 27. 09:16

p150~

 

죄책감 문화와 수치심 문화와는 매우 다른 인간을 만들어 낸다. 미국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이 문제를 이렇게 설명한다.

 

"도의적 죄책감은 수치심에 비할 수 없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도의적 죄책감은 보상이 가능하고 한 사람의 내면의 총체성을 더럽히지도 않는다. 도의적 죄책감은 자신을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고양된 정서이다. 도덕성은 금지시키고 숨 막히는 규율을 들이대며 완벽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완벽하지 못함을 인정해 주면서 그래도 세상에는 용서라는 자비심이 있다고 말해주어 아이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치 있고 관심어린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이다. 따라서 아이는 자신의 인간적 결함이 세상을 괴롭히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아이는 자신의 결함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늘 착하게만 행동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고 그래서 부러움과 질투 같은 감정을 가질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어떻게 보면 수치심 문화가 가장 완벽한 도덕에 부할될 것처럼 생각되지만, 실제로 그것은 시샘, 부러움, 자기혐오, 다른 사람을 향한 증오의 문화만 낳는다. 어느 시대이든 수치심 문화는 가장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왜냐하면 그런 문화는 공감 본능르 가두어 놓고, 그래서 다른 사람의 곤경을 느껴 보거나 동정심을 갖고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아이가 수치심 문화 속에서 완전무결한 기준에 맞추어야 하고 그렇지 못할 때 사회의 분노를 고스란히 겪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자란다면, 그 아이는 똑같이 엄격하고 완고한 기준으로 다른 모든 사람을 판단하게 될 것이다. 공감이 부족하기 때문에, 아이는 다른 사람의 괴로움을 자신의 것처럼 느낄 수 없고, 따라서 그들의 곤경은 그들의 결함 때문이라고 판단하게 된다. 사회가 그들에게 기대하는 수준의 완벽함에 맞추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도 전통 사회를 들여다보면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수치심 문화는 버젓이 존재한다. 성폭행 당한 여성을 자신과 가족을 욕되게 했다는 이유로 가족이나 이웃이 돌로 쳐 죽이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그 여자의 고통을 공감하기는 커녕 사회가 앞장서서 더 큰 벌을 가하는 것이다. 그녀는 무고한 희생자이지만 사회의 눈으로 볼 때 그녀는 성 폭행이라는 수치심을 안고 있는 하자있는 인간일 뿐이다. 가족이나 이웃의 입장엣 볼 때 그녀의 몸은 영원히 더렵혀졌고 순결하지 못하다. 따라서 혐오의 대상은 제거되어야 한다. 동정을 짓뭉개고 인간을 괴물로 만드는 수치심 문화의 폭력은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끔찍하다.

 

프로이트라 해도 추리 훈련에는 찬성하지 않았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죄책감이 도덕적 의식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지만, 죄책감에 대한 그의 개념은 대상관계론자와 애착이론 신봉자의 전제와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출발한다. 프로이트는 죄책감을 갖게 되는 것은 자신이 괴롭힌 상대방의 고통 때문이 아니라 부모의 벌이 두렵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죄책감은 두 가지 기원을 갖는다. 하나는 권위에 대한 두려움이고, 또 하나는 나중에 나타나는 초자아(super ego)에 대한 두려움이다. 첫번째 것은 본능적 만족을 단념하라고 재촉하고, 두번째 것은 그런 요구와 함께 처벌을 들이댄다. 초아아는 금지된 욕망이 계속되는 것을 알아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죄책감은 부모의 처벌이 두려워 생기는 것이고, 그 죄책감은 내면화되어 아이를 도덕적으로 만든다. 처음에는 부모 때문이지만 나중에는 사회에 의해 처벌을 받을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이처럼 인간의 본성을 염세적으로 바라보는 프로이트의 견해도 당대에는 아무런 도전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1919년 영국 사회학자 윌프레드 트로터는 인간이 무리를 이루는 동물이며 따라서 본능적 충동은 서로 보호하기 위한 것이고 그런 행동이 개인과 무리의 생존을 한층 안전하게 해준다는 이론을 내놓았다. 트로터에 따르면 이타성은 인간이 무리 본능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우리의 생리적 구조의 핵심에 내재되어 있는 요소이다. 프로이트 시대의 통념과 어긋나는 자연도태에 대한 또 다른 견해인 것이다. 인간이 서로 볻는 것은 서로에게 책임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혈적이 아닌 사람에게 책임을 느끼는 정도는 그가 사는 사회적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 트로터의 학설은 프로이트로서는 기겁할 만한 이론이었다. 왜냐하면 트로터가 옳다면, 프로이트가 치밀하게 짜놓은 스토리는 완전한 픽션이며 우분한 생물학적인 근거도 없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와 트로터는 대척점에 놓인 것이다.

 

"인간이 무리 동물이라는 트로터의 주장을 반박하려면 인간은 우두머리가 이끄는 무리 동물이라고 주장해야 한다."

 

우리는 상대방의 고통을 보고 공감적 고통을 느끼고, 특히 그의 고통에 자신의 책임이 일부나마 있다면 당연히 죄책감을 갖게 되고 뭔가 수습할 생각을 하게 된다.

공감적 고통, 죄책감, 수습하려는 욕구는 그 자체로 자연도태에 의해 한계가 정해진다. 공감적 표현에는 최소 촉발점과 아울러 최대 한계도 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고 공감적 고통이 일어나지 않는 상황도 무수히 많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혐오스러운 집단의 일원이나 낯선 사람이거나, 그들의 고통이 시간이나 공간적으로 실감나지 않는 경우 공감적 고통을 촉발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공감적 과잉각젓이란 경우도 있다.

"공감적 과잉각성은 관찰자의 공감적 고통이 너무 심하고 참을 수 없을 정도여서 그것이 강렬한 고통으로 변형될 때 일어나는 무의식적인 과정이다. 그 정도가 되면 관찰자는 오히려 공감적 분위기에서 완전히 빠져나가게 된다."

남을 돌봐주는 사람들, 특히 의사나 간호사들은 흔히 말하는 '동감피로증'에 걸리기 쉽다. 사회복지사도 그렇고 전쟁터나 재해현장에서 비상구조대원으로 근무하는 사람들도 이런 증세에 취약하다. 끊임없는 공감 과잉은 정서적 고갈을 가져와서 공감적 반응은 무뎌지며 정서는 메말라 간다.

실제로 모든 사람이 매순간 공감적 고통과 이타적 행동을 경험해야 한다면, 정작 자신의 정서적, 인지적, 신체적 행복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생리적 구조는 공감 각성에 최소의 발단과 최대의 한계를 설정해 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