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도서

나는 왜 내 편이 아닌가 -브레네 브라운

평화숲 2013. 12. 2. 01:23

 


나는 왜 내편이 아닌가

저자
브레네 브라운 지음
출판사
타임컨텐츠 | 2013-02-19 출간
카테고리
자기계발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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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마음의 수렁, 관계의 비수' 나를 갉아먹는 감정 이해하기

나를 괴롭히는 이 수치심이라는 감정의 정체는 무엇인가? / 수치심은 다른 유사한 감정들과 어떻게 다른가?  / 온갖 사회적 기대로 얽혀 있는 수치심 거미술 / 앞으로도 뒤로도,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이중 잣대 / 나의 파워를 수치심이라는 감정에게 내어주게 되면 / 나와 다른 이들 사이의 끈을 끊어버리는 수치심의 위력

 

'수치심을 불러일으키거나 무시하는 것으로 한 사람의 행동을 바꿀 수는 없다.'

-사람을 변화시키거나 행동을 변화시키는 수단으로 수치심이나 모욕감을 이용할 수 있는가?  : 그렇다, 또는 아니다. 겉으로 드러난 과민성을 정확히 조준하기만 한다면 즉각적인 행동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도 사실다.

-그 변화가 오래가는가? 아니다.

-그 변화가 고통스러운가? : 그렇다. 매우 고통스럽다.

-그것이 해를 끼칠 수도 있는가? : 그렇다. 수치심을 이용한 사람과 그걸 당한 사람 모두에게 상처를 남길 가능성이 있다.

-수치심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방법을 자주 사용되는가? : 그렇데 매일 매 순간.

 

[수치심의 정체는?]

수치심이란 나에게 결점이 있어서 사랑이나 소속감을 누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극심한 고통을 뜻한다.

 

[수치심은 다른 유사한 감정들과 어떻게 다른가?]

수치심 / 죄책감 / 모욕감 / 당혹감

-당혹감 : 네 감정 중에 가장 약하다. 일부러 하고 싶지는 않지만, 설령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죄책감 : 수치심과 가장 혼동되는 감정이다. 죄책감은 변화의 긍정적인 계기가 될 가능성이 높지만, 수치심은 더 나쁜 행동이나 정신적 마비를 초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죄책감과 수치심은 둘 다 자기평가의 감정이다.

죄책감은 "나는 나쁜 행동을 했다"이고, 수치심은 "나는 나쁘다."이다. = 죄책감이 '행동'에 국한된 것이라면, 수치심은 '존재'로까지 확대된다.

죄책감은 자신의 윤리관, 가치관, 믿음에만 반하는 행동을 했을 때 생기는 감정이다.

수치심은 내가 한 행동보다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에 초점을 맞춘다. 나는 나쁜 사람, 사기꾼,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자꾸하게 하게 되면 정말로 그 생각을 믿게 된다.

수치심이 파괴적인 핻옹의 근본 원인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사랑받고 싶어 하고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다. 그런데 수치심을 경험하면 단절감이 엄습해오면서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 더욱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게 된다. 수치심을 느끼거나 수치심을 겪을까봐 두려워질 때 우리는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하고, 남을 공격하거나 남에게 모욕을 주거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보고도 가만히 침묵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모욕감 : 사람들은 수치심을 느끼는 것에 대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모욕감을 느끼는 것에 대해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치심은 일종의 감옥이다. 자신에게 뭔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감옥에 갇히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끼는 상태다.

 

[온갖 사회적 기대로 얽혀있는 수치심 거미줄]

수치심은 거미줄처럼 겹겹이 얽힌 서로 모순되고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여러 사회와 집단의 기대들'로 인해 수치심을 겪고 있다. 사회와 집단의 기대들이란 대개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나는 ~가 되어야 한다. (who should be)

-나는 ~를 해야 한다. (what should be)

-나는 ~게 해야 한다. (how should be)

기대의 거미줄에 포획된 사람들은 두려움, 비난, 단절감이라는 감정에 공격당하게 된다.

 

[옴짝달쌀 못하게 하는 이중 잣대]

수치심은 유대가 깨지는 '단절에 대한 두려움'과 관련이 있다.

수치심의 포획망에 걸려들었다는 두려움은 수치심 거미줄이 요구하는 기대에 충족할 방법이 현실적으로 터무니 엇이 부족하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기대에 비해, 그중 상당수가 실현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중구속 : 날씬해야 한다. 하지만 몸무게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소중히 하라. 자신감 넘치는 여성이 제일 섹시하다. 단, 당신이 이미 어리고 날씬하고 아름다울 경우

 

[나의 파워를 수치심이라는 감정에게 내어주게 되면]

수치심은 위협적인 감정이어서 뇌에서 생각, 분석, 반응을 담당하는 신피질이 그걸 처리하지 못하고, 바로 '싸움 혹은 도주'의 동물적인 상태로 퇴보한다고 한다. 신피질이 일시적으로 마비되어 이성적인 감정 처리가 불가능해지고, 대신 두뇌의 동물적인 부분이 활동하면서 공격적으로 변하거나 도망치려 하거나 온몸이 얼어붙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유조차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나와 다른 이들 사이의 끈을 끊어버리는 수치심의 위력]

타인에게 인정과 사랑과 존중을 받는다고 느끼고 스스로 가치있는 존재라고 느끼게 해주는 유대감과 달리, '단절감'은 타인에게 거부당하는 느낌과 함께 스스로를 한없이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로 여기게 만든다.

 

요약

수치심은 나에게 결점이 있어서, 사람들이 그걸 알거나 찾아내면 사랑 받고 소속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 때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을 말한다. 현대인, 특히 여성들은 겹겹이 중첩되고 서로 모순된 다양한 사회와 공동체, 타인의 기대로 만들어진 수치심 거미줄 안에 포확되어 수치심을 경험한다. 수치심은 곧 두려움, 비난, 단절로 이어진다.

 

2장 혼자만의 외로운 사투를 멈추고, 공감의 손길을 내밀라

공감은 수치심의 강력한 해독제다. / 공감, 충분히 대접받고 있지 못한 그 위대한 힘 / 공감은 누구나 배울 수 있는 삶의 기술이다. / 용기있는 입과 자비 담긴 귀가 공감을 빚어낸다. / 공감을 하기에 너무 늦은 때란 없다 / 누군가와 진심으로 연결되고 싶다면, 공감을 선물하라. / 공감으로 연결되려는 순간, 그것을 가로막는 장애물들 / 내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수치심 따위는 없다. / 수치심으로는 절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 / 수치심 회복탄력성은 어떻게 길러질 수 있는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이상, 관계가 단절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가져다주는 수치심은 영원히 우리 삶이 동반해야 할 친구와도 같다. 하지만 다행히 수치심으로부터 빨리 제자리로 돌아오는 기술, 즉 수치심 회복탄력성을 기를 수 있다. 공감은 수치심의 강력한 해독제이다.

수치심의 '두려움', '비난', '단절감' 이것으로부터 '용기', '자비', '유대감'으로 이행하려면 수치심 회복탄력성으로 옮겨가는 전략이 필요하다.

두려움 → 용기, 비난 → 자비, 단절감 → 연대감.

공감은 상대가 고백하는 경험을 이해하기 위해 나의 경험을 되짚어볼 수 있는 기술 혹은 능력이다. 공감은 타인의 관점에서 상황을 인식하는 능력, 타인의 특별한 세계를 보고 듣고 느끼는 능력이다. 공감은 일종의 기술이다. 공감을 하고 표현하는 능력은 타고나는 것도 직관적으로 체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공감은 다른 사람의 기분을 단순히 헤아리는 것과도 다르다.

공감은 누구나 배울 수 있는 삶의 기술이다. 1. 타인의 입장에서 세상을 본다. 2.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3. 타인의 감정을 이해한다. 4. 타인의 감정을 이해한다는 사실을 전달한다.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수치심 따위는 없다. 초등학교 5학년에게 나타난 수치심 성향은 훗날 징계, 약물남용, 자살 시도 등과 유의미한 연관성이 있는 지표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수치심으로는 절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

해리엇 런너는 저서 <마음을 열어주는 대화법>에서 아내를 폭행한 남편 '론'은 '폭력남편'그룹에 속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분노조절 능력에 문제가 있는'그룹에는 순순히, 아니 심지어 흥미를 보이며 참여했다고 했다.

"당신은 론이 폭력남편이므로 그 사실을 희석하거나 모호하게 만드는 것은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론은 자신에게 폭력남편이라는 라벨 외에 다른 모습이 있다는 걸 인정받을 때라야, 진정한 책임감과 후회를 느낄 가능성이 더 많아보였다.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직시하고 진심으로 책임감을 느끼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발을 딛고 설 자존감이 필요하다.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자신을 지탱해줄 자존감이 남아 있어야만, 자신의 과오나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시야가 열린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만 진심으로 사과를 할 수 있다."

러너 박사는 '자기가 저지른 최악의 악행으로 자신의 정체성이 정의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야 말로 건전한 저항이라고 설명한다. '론=폭력행동'이라는 공식은 성립했다면, 그는 절대 책임감을 느끼지도, 진심으로 후회하고 슬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라는 느낌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러너 박사는 론의 이야기를 이렇게 끝맺었다. "내가 저지른 최악의 행위로 나의 정체성이 규정되거나 제한된다면, 우리는 도저히 버텨낼 수 없다. 모든 인간은 자신을 복잡하고 다면적인 존재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사실을 부정당하면 인간은 살아남을 방편으로 자신을 '부정의 벽'으로 겹겹이 감싸게 된다.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 사과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해 사과하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일까?"

 

미하원의원인 테드 포 판사는 범죄자들에게 '수치심과 모멸감 처벌'을 내림으로써 초미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인물이다. <휴스턴 크로니클>에 실린 논설에서 포 판사는 자신의 판결을 이렇게 변호했다. "아내를 구타하고 이웃의 재산을 훔치고 아동을 학대하는 자는, 사회로부터 미움을 받고 욕을 먹고 공개적으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들은 수치심으 느껴야 한다. 그렇게 만들지 못한다면, 우리 스스로가 수치스럽게 여겨야 할 것이다."

수치심과 모멸감에 사로잡힌 남편과 남은 시간을 함께 하는게 과연 안전한 일일까? 수치심이 누군가의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그러기에 처벌 수단으로 쓰여도 무방한가? 내가 두렵고 화가 나고 비난을 받을 때, 단지 기분이 나아진다는 이유로 남을 괴롭히고 수치심을 안겨주는 것이 옳은가?

 

3장 감정의 폭풍이 몰아닥치는 순간, 10분의 대응 기술

수치심을 자극하는 나만의 '수치심 촉발제' 찾아내기  / 나의 무의식에 스며든 암시, '원치 않는 정체성' / 취약하다는 것은 창조성과 변화의 원천이다 / 나만의 수치심 촉발제를 찾기 위한 '탐구의 여정' / 두려움으로부터 나를 숨겨버리는 기제, 수치심과 연막

수치심은 두려움, 비난 같은 강력한 감정을 동반하고 홍수처럼 무서운 속도로 빠르게 들이닥친다. 미처 방어할 새도 없이 허둥대다가 자아를 잃어버리고 그 물살에 쓸려가 버리고 만다.

의식이 수치심을 알아차리기 전에 신체가 먼저 반응을 보인다. '신체적 반응'. 몸으로 수치심을 느낀다는 말이다.

-수치심을 느낄 때 내 몸은 ----------------한다.

-수치심을 느낄 때 느낌은 마치 ------------같다.

-수치심을 느낄 때 익숙한 느낌은 ----------------이다.

-수치심에 맛이 있다면 -------------------이다.

-수치심에 냄새가 있다면 --------------이다.

-수치심을 만질 수 있다면 ---------------이다.

'수치심 알아차리기'는 자기를 지키기 위한 힘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매우 중요한 방법이다.

 

[수치심을 자극하는 나만의 '수치심 촉발제' 찾아내기]

 

[나의 무의식에 스면든 암시, '원치 않는 정체성']

수치심을 자극하는 12항목

외모와 바디이미지, 모성, 가족, 육아, 돈과 직업, 정신과 육체 건강, 성생활, 나이, 종교, 전형화와 꼬리표, 자기생각 말하기, 트라우마.

심리학자 타마라 퍼거슨과 하이디 에어, 마이클 애쉬베이커는 '원치 않는 정체성'이 수치심의 전형적인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원치 않는 정체성이란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모습과 위배되는 특성을 말한다. 타인이 강요하는 경우도 있지만, 스스로가 뒤집어씌우는 경우도 있다.

원치 않는 정체성은 성장 과정에서 고정관념이나 암시를 주입하는 주체, 특히 가정, 학교, 종교집단 등으로부터 생겨난다.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역시 부모와 양육자다. 모든 가정에는 저마다의 정체성이 있고 수치스럽게 여기거나 용납하지 않거나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이른바 '원치 않는 정체성'또한 존재한다.

가족을 통해 습득한 암시는 쉽게 사라지지않고 자기도 모르게 서서히 스며든다.

 

[취약하다는 것은 창조성과 변화의 원천이다]

수치심 촉발제는 우리 각자가 지닌 '취약성'과도 관련이 있다. 자신의 취약성을 발견하고 인정하면 수치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진정한 파워를 갖게 된다. 수치심을 느낄 때 우리는 혼란, 두려움, 비판받는다는 느낌이 뒤엉킨 상태가 된다. 그런데 그것이 나의 취약성으로 인한 것임을 안다면, 내가 왜 그랬으며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게 되어 혼란, 두려움, 비판받는다는 느낌에서 빠져나올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나만의 수치심 촉발제를 찾기 위한 '탐구의 여정']

원치 않는 정체성 : 나는 ~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다. 사람들이 나를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수치심은 대개 '자각'의 문제다. 수치심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적용하는 '타인의 시선'이다. '남들이 날 어떻게 볼까',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되고 싶은 모습과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이 상충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 이기를 원한다.

나는 .....................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1. 이 모습들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

2. 왜 이런 모습을 원하지 않을까?

3. 이런 모습들을 싫어하도록 만든 암시는 어디에서 왔는가?

 

4장 리얼리티 체크, 나는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큰 그림 보기, 비판적으로 현실을 인식하기 위한 토대 / 세상과 내가 만들어낸 '기대치'와 '현실' 사이의 괴리  / 개별화했던 문제를 큰 그림으로 보고 '맥락 이해'로 전환하라 / 맥락 이해가 '책임전가' '회피'기제와 다른 까닭 / 당신은, 나는, 우리는 무슨 몹쓸 병에 걸린 게 아니다. / 모른다고 말할 자유, 자격과 권위에 주눅 들지 않을 자유

 

[큰 그림 보기]

비판적 인식을 '비판적 자각' 혹은 '비판적 관점'이라고도 부른다. 비판적 인식의 핵심은 '개인 경험'과 '사회 시스템' 사이의 상관관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비판적 인식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수치심 촉발제가 사회, 경제, 정치의 영향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깨달을 수 있다.

 

-외모에 대한 사회와 공동체의 기대는 무엇인가?
-왜 이런 기대가 존재하는가?

-이런 기대가 어떻게 작용하는가?

-우리 사회는 이런 기대들로 부터 어떤 영향을 받는가?

-이런 기대들로 수혜를 입는 이들은 누구인가?

 

이렇듯 큰 그림에 대해, 즉 '우리에게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사회적 기대들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우리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그 결과 사회적으로 어떤 부작용을 낳고 있는지' 묻고 대답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비판적 인식을 개발할 수 있다.

 

[세상과 내가 만들어낸 '기대치'와 '현실' 사이의 괴리]

다음 단계는 이런 정보들을 토대로 우리가 가진 '수치심 촉발제'의 실체를 파헤쳐보는 것이다. 다음 6가지 질문이 여기 해당된다.

 

-내가 가진 기대는 얼마나 현실적인가?

-나는 항상 그런 기대를 만족시키는가?

-내가 가진 기대가 서로 상충하지는 않는가?

-내가 가진 기대는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인가, '남들이 내게 바라는 모습'인가?

-누군가 나를 '원치 않는 정체성'으로 바라본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나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를 통제할 수 있는가?

 

개인과 사회의 상호작용이라는 큰 그림을 들여다보고, 현실 점검을 통해 수치심을 촉발하는 근본 원인을 파헤쳐보았다면, 이제 그것을 모두 '연관지어' 생각해봐야 한다. 이것이 바로 비판적 인식의 '실천'이다. 비판적 인식의 실천을 위해서는 우선 다음 세 가지 훈련이 필요하다.

 

-맥락 이해 (큰 그림을 보자)

-정상화 (나만 그런게 아니다.)

-의문 타파 (벽을 쌓게 만드는 상황에 문제제기를 하자)

 

비판적 인식을 실천하지 못할 경우, 우리 각자는 계속 더 자기 안의 수치심을 강하게 만들 수 밖에 없다.

 

- 개별화 (나만 그렇다)

-병리화 (나는 뭔가 문제가 있다)

-강화 (나는 당신들과는 다르다)

 

수치심과 관련된 큰 그림, 즉 수치심을 유발하는 요인과 사회의 기대들 사이의 연관성을 파악하지 못하면 모든 화살을 '나'에게로 돌리기가 쉽다. 나만 그런게 아니고 다른 많은 사람들도 그럴 수 있다는 걸 받아 들이지 못하면, 내가 수치심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는 식으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게 된다. 비판적 인식을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전략을 알아보고, 그 단게에서 부딪히기 쉬운 장애물 역시 하나씩 파헤쳐보자.

 

[개별화했던 문제를 큰 그림으로 보고 '맥락 이해'로 전환하라]

'context'는 본래 '함께 엮어 짜거나 꼬다'라는 뜻의 라틴어 'contexere'에서 유래됐다. 즉 하나의 경험에서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선 어떤 요소들이 뒤섞여 있는지 큰 그림을 보아야 한다. 충분히 뒤로 물러나서 바라보면, 정치 경제 사회적 압력이라는 맥락까지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맥락 이해'는 수치심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필수적인 단계인 것이다.

수치심이 개인의 문제가 되기도 하고, 심해지면 정신병을 유발하기도 한다. 하지만 수치심은 기본적으로 나와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감정, 즉 내가 타인의 시선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봄으로써 느껴지는 감정이다. 결국 수치심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며, 사회문화적 기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을 맺는다. 그래서 나는 수치심을 '심리-사회-문화적 감정'이라고 부른다.

 

[맥락 이해가 '책임 전가'나 '회피' 기제와 다른 까닭]

큰 그림을 보고 맥락 이해가 필요하다고 말하면, "결국 자기 책임을 회피하고 시스템의 문제로 책임을 전가하는 것 아니냐?"고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책임을 다른 문제로 전가하지 말라고 배웠다.

-내가 실업자인 건 내 탓이 아니야  → 경제 상황 탓이야.

-내가 매번 다이어트를 시도하다 실패하는 건 내 탓이 아니야 → 다이어트 산업의 음모야

-내가 빚더미에 앉은 것은 내 탓이 아니야 → 악마 같은 신용카드사들 때문이야

 

맥락이해는 책임저가나 회피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성찰이다. 나와 인터뷰한 사람들은 '큰 그림을 보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려주었지만, 변명을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큰 그림을 이해하고 '나 혼자만 그런 고통을 당하는 게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긍정적인 변화를 위한 힘'을 얻었다.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문제에 어떤 맥락이 얽혀 있는지 비판적 인식을 높이기 위해서는, 사회구조만 탓하는 것은 자기 자신만 탓하는 것만큼이나 파괴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상황을 변화시키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큰 그림을 보는 것이며,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문제를 개인적인 것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

 

[당신은, 나는, 우리는 무슨 몹쓸 병에 걸린 게 아니다]

수치심으로부터 빠져나오게 하는 가장 힘이 되는 말은 '너만 그런 게 아니야'라는 공감이다.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이런 거야'라고 독백할 때 수치심은 그 힘이 엄청나게 커진다. 하지만 나 말고도 친구, 사회, 공동체의 수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일을 겪는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부터, 수치심은 힘을 잃어버린다. '정상화'란 나의 문제가 '누구에게든' 똑같이 생길 수 있다는 걸 깨닫는 것이다. '정상화'의 반대말은 '병리화'다. 나의 문제를 병으로 판정하는 것이다. 나는 비정상이고 일탈 상태라고 분류하는 것이다. 비판적 인식을 망각하면, 우리는 아주 쉽게 사회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나 자신을 비정상이라고 간주하게 된다.

 

[모른다고 말할 자유, 자격과 권위에 주눅 들지 않을 자유]

비판적 인식을 실천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해야 할 것은 '의문 타파'다. 진실을 파헤치려면, 그걸 부수고 '의문'을 밖으로 끄집어내면 된다. 우리는 흥미롭거나 특이한 것, 심지어 궁금해 미칠 지경인 대상에 대해서조차 '나는 저걸 캐물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 그냥 돌아서곤 한다. 비판적 인식을 통해 '의문 타파'를 시작하면, 우리는  그 답변이 왜 감춰져 있게 됐는지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의문 파타'와 '강화'는 상대적인 문제이며, 늘 선택의 문제이기도 하다. 의문이 생겼는데도 질문하지 못하는 것, 내가 가진 어떤 정보를 강화하고 은폐하려는 것, 그것이 어디로부터 비롯됐는지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왜 나는 그걸 묻지 못할까', '왜 나는 이걸 통해 나를 과시하려 할까?' 수치심으로부터 회복하는 힘을 기르기 위해 통과해야 할 또 하나의 과정이다.

수치심은 실제로 '학습의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다. '배운 사람처럼 보여야 한다.'는 압박감이 '실제로 배우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배운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쌓고 지키려고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데 반해, 정작 지식을 쌓기 위한 필수적인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고 질문할 용기'를 내지 못한다.

 

5장 소리 죽여 고통스러워하는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주라.

수치심은 고립의 산물, 연결만이 그것을 깨드릴 수 있다. / 주변으로 손을 뻗어 모두를 위한 '변화 만들기'를 시도하라. / 분리와 벽 쌓기, 손 내밀기를 가로막는 장애물 / 연결 네트워크,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간정 구조대

 

[수치심은 고립의 산물, 연결만이 그것을 깨뜨릴 수 있다.

진 베이커 밀러와 이이린 스티버는 저서 '힐링 커넥션'에서 말한다. "삶을 자세히 관찰해보년, 타인과의 연결이 성장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존재감과 자존감은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능력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타인과의 연결을 갈망한다. 인정과 사랑을 받지 못하고 어디서도 환영 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 때, 우리는 수치심을 경험한다.

타인에게 손을 내밀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홀로, 수치심의 구렁텅이에 빠져 입을 다물고 속으로 괴로움을 삼키게 된다. 수치심으로 상대를 바꿀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상대의 수치심으로 내가 이익을 얻을 수도 없다. 반면 자비를 통해서는 얼마든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상대의 것을 빼앗아 얻는 이익이 아니라, 상대와 내가 똑같이 얻는 이익이다. 타인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그들과 연결됨으로써 나와 그들 모두를 돕기 위함이다.

분리 · 벽 쌓기 → 경험 공유 · 변화 만들기

 

[주변으로 손을 뻗어 모두를 위한 '변화 만들기'를 시도하라]

변화를 만들기에 동원할 수 있는 수단으로 나는 주로 6가지를 꼽는다. 나 자신, 펜, 투표, 참여, 구매, 시위가 그것이다.

해리엇 러너는 저서 '마음을 열어주는 대화법'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상관관계가 늘 확연히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의 변화는 사회정치적 변화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분리와 벽쌓기, 손 내밀기를 가로막는 장애물]

말할 수 있는 용기와 들을 수 있는 자비를 실천하는 데 방해가 되는 두 가지가 있다. 바로 '분리'와 '벽 쌓기'다.

수치심을 부추기는 문화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두려움, 비난, 고립감에 시달린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우리'와 '그들'이라는 분리 문화를 조장한다. 그 결과, '나와는 다른 그들'로부터 나를 지켜줄 벽을 높이, 아주 높이 쌓아올린다.

 

[연결 네트워크,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감정 구조대]

수치심 회복탄력성을 기르고 싶다면 반드시 손 내미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용기, 자비, 유대감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

-나의 연결 네트워크를 이루는 개인이나 집단은 누구인가?

-나에게 공감과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은 누구인가?

-이 사안에 대해 내게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개인과 집단은 누구인가?

-이 사안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볼 때 나는 공감의 손길을 내미는가. 아니면 젹을 쌓는가?

 

6장 입 밖으로 꺼내놓으면, 절반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적절한 언어로 번역해내는 법 / 내가 받은 수치심의 경험을 언어로 해석해내는 법 / 들러대거나 미화하려 하지 말고 솔직히 감정을 말하기 / 수치심 거미줄 언어의 미묘한 특징 파악하기

 

현대사회에서 단절에 대한 두려움은 매우 극명하다. 우리는 모두 관계를 맺고 소속감을 느끼며 그 안에서 내가 안전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그토록 소속되고 싶어하는 그 사회와 문화가 뿜어내는 여러 기대와 암시가 동시에 두려움, 비난, 단절을 빚어내기고 한다.

 

7장 완벽하고, 특별하고, 우아하고, 뛰어나지 않아도 괜찮다.

완벽주의가 빚어내는 수치심과 두려움이라는 감정 / 완벽해야 하지만 완벽하려 애써서도 안 된다는 역설 / 수치심 회복탄력성을 이용해 완벽주의로부터 벗어나는 법 / 완벽주의 대신, 조금씩 성장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지향하라 / 실수해도 괜찮다, 다시 돌아가면 된다. / 평범해도 괜찮다, 쿨하지 않아도 괜찮다, 두려움 떨쳐내기 / 불완전함가 평범함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어 준다.

 

두려움과 수치심만큼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 감정도 없다. 이 둘은 수시로 서로 힘을 합쳐 강력한 감정의 폭풍을 일으킨다. 수치심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또 다시 수치심을 낳는다. 수치심 혹은 단절에 대한 공포가 다른 많은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 그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는 문제들이 불완전함, 평범함, 쿨하지 못함, 취약함에 대한 두려움이다.

 

[완벽주의가 빚어내는 수치심과 두려움이라는 감정]

앤 라모트는 "완벽주의는 압박의 목소리다"라고 말했다. '되고 싶은 완벽한 사람'은 어디서 만들어진 것일까? 바로 우리를 둘러싼 수치심 거미줄이다. 가족, 배우자, 연인, 친구, 나 자신, 직장 동료, 사교 모임 구성원들이 각자 우리에게 기대하는 모습을 모두 합친 것이 내가 '되고 싶은 완벽한 사람'이다. 외모, 가족, 일, 사랑 등등 각각의 수치심 항목에 이 완벽주의가 영향을 미친다. 물론 모두가 입 밖으로 소리내어 그런 기대를 강요하지는 않는다. 매일 접하는 TV, 동화책, 장난감, 어른들의 대화, 교사의 말, 또래들의 말이 사방에서 조용히 기대를 드러낼 뿐이다.

수치심은 수치심을 낳는다. 수치심을 활용해서 아이에게 동기부여를 시도할 수도 있다. 그도 아니면 아이가 알아서 바디이미지를 잘 형성할 것일고 놓아두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바디 이미지와 관련해서 중간적인 위치라는 것이 없다. 자녀가 바디 이미지에 대해 긍정적인 개념을 갖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는 이상, 아이들은 사회와 대중매체가 강요하는 기대에 희생될 수 밖에 없다.

 

[완벽해야 하지만 완벽하려 애써서도 안 된다는 역설]

 

 

 

8장 비난과 책임전가를 넘어서, 자비의 힘을 실천하는 법

분노, 약한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무기 / 자신의 존재가 무시당했다고 느낄 때 수치심은 분노로 바뀐다 / '주제 파악 좀 하시지!' 전형화와 꼬리표의 족쇄 / 나이 먹은 사람에 대한 전형화 역시 공포를 조장한다 / 트라우마 보다 더 큰 상처를 안겨주는 트라우마의 전형화 / 따돌리기, 소속감을 얻기 위해 누군가를 희생 제물로 삼는 일 / 험담의 수레바퀴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을까 / 비난에 맞서기 위해 연결 네트워크 활용하기

비난은 책임을 지는 것과 전혀 다른 일이다 ㅣ책임지는 것과 비난하는 것의 차이는 죄책감과 수치심의 차이와 비슷하다. 죄책감과 마찬가지로 책임을 지는 것은 잘못된 상황을 개선하고 바로잡겠다는 의지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신의 행동과 그로 인한 결과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반면, 비난은 주체할 수 없는 두려움과 수치심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비난의 문화는 우리 삶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나와 남을 비난하고, 수치심을 주입시킨다. 앞에서 '분리'와 '벽쌓기'에 대해 언급했는데, 이 둘로 바로 비난 문화의 부산물이다.

비난은 몇 가지 특징을 지닌다. '분노', '비가시성', '전형화와 꼬리표', '따돌리기'가 그것이다.

 

[분노, 약한 나를 보호하기 위해 사용하는 무기]

수치심과 비난의 문화에서 우리는 어딜 가든 분노를 목격한다.  분노를 일으키는 경험과 감정은 다양하다. 수치심, 모멸감, 스트레스, 걱정, 불안, 슬픔, 그 밖에의 다양하고 사소한 원인들이 분노를 일으킨다. 다양한 원인이 일으킨 '고통'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로 '분노'가 나타난다.

분노는 '힘과 권위'의 감정이기 때문에, 분노를 표출하면 일시적으로 '통제력'을 찾은 것처럼 느낀다. 통제력을 되찾고 싶은 이유는 수치심이 우리 안에 있던 가치와 능력과 자존감을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반항하기'는 상대보다 더 큰 힘을 갖고 공격적이 되어서 상대를 수치스럽게 만듦으로써, 자신의 수치심에서 벗어나려는 전력이다.

많은 연구 참가들이 견딜 수 없는 수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분노와 비난을 이용했다고 말했다.

'수치심에서 비롯된 분노는 대인관계에 심각한 문제를 초대할 수 있다' 수치심의 고통으로부터 자기를 방어하기 위한 분노와 비난은 상대가 멀어기제 만들거나, 혹은 적대감, 비난, 상호비방만을 가중시킨다. 이 둘 다 대인관계에는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신의 존재가 무시당했다고 느낄 때 수치심은 분노로 바뀐다.]

수치심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분노와 비난을 이용하게 되는 이유는 수치심이 느껴질 때, 나의 모든 것이 고스란히 '폭로'되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수치심은 폭로 혹은 폭로에 대한 두려움과 관련이 있다. 조롱거리가 되거나 비난받을 만한 '결점'을 숨기려고 무진장 애를 쓰는 이유가 여기 있다. 나의 결점을 누가 알게 되면 무시당할지라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당당하게 말하지 못한다. 완벽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욕구 때문에 행동을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주제 파악 좀 하시지!' 전형화와 꼬리표의 족쇄]

전형화란 특정 집단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거기 속한 사람들을 판단하는 '과도한 일반화의 엄격한 관점'이다.

미리 정한 범주에 상대를 집어 넣고, 그 범주를 통해 상대를 이해하려 한다. 그 범주를 근거로 상대가 겪는 고통을 비난하거나, 우리가 상대에게 품어야 할 자비를 회피하게 만든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개인에 대한 것이든 집단에 대한 것이든, 어떤 전형화나 해롭기는 마찬가지다. 긍정적인 전형화는 장점만 부각한 이상적인 이미지를 부여하고, 부정적인 전형화는 비하와 조롱이 담긴 이미지를 부여한다. 그리나 어느 쪽이든 상대를 '내 마음대로 분류하고 판단한다'는 점에서 같다.

전형화에는 두가지 서로 다른 방식이 있는데, '속삭이는 꼬리표'와 '비방'이 있다. 전형화와 꼬리표는 잘못된 근거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게 만들어 관계형성의 기회를 제한한다. 상대에게는 자신을 제대로 알릴 기회가 없다. 꼬리표는 이미 사회가 만들어 놓은 기대에 맞서 '이미 결과가 정해진' 싸움에 뛰어들게 만듦으로써 존재감을 사라지게 한다.  비방중 대다수는 누군가가 사회의 집단적 기대에서 일탈하는 순간 빠르게 쏟아진다. 그리고 너무도  흔하게 사용되기 때문에, 그걸 사용하는 우리를 무디게 만든다.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정체성을 비하하고 모욕을 주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비방'은 전형화를 강화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 중 하나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이토록 쉽게 전형화를 하도록 부추기는 메커니즘 중 하나가 바로 '예외화'다. 전형화를 할 때, 거기서 나나 가까운 사람을 제외함으로써 전형화 자체를 합리화하는 것이다.

전형화와 꼬리표는 수치심을 일으키는 족쇄가 된다.

 

[나이 먹은 사람에 대한 전형화 역시 공포를 조장한다 ]

전형화는 비난과 무시의 한 형태이며, 이 두가지는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주요한 요인들이다 .

 

[트라우마보다 더 큰 상처를 안겨주는 트라우마의 전형화]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당한 여성은 '트라우마를 근거로 정체성을 규정하려는 타인의 시선'을 수치심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꼽는다

'어떤 사람이어야 한다', '어떻게 보여야 한다',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한다'에 대한 사회공동체적 기대를 따르는 순간, 우리는 진정한 이해와 유대감 대신 전형화와 비난을 하게 되는 것이다 . 거기엔 그런 사회공동체적 기대들을 거부하는 데 대한 두려움도 있다. 그런 기대를 거부하면 주위로부터 외면당하고 버림받는 고통스러운 결과가 따른다는 것을 우리는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목격한다.

 

[따돌리기, 소속감을 얻기 우해 누군가를 희생 제물로 삼는 일]

험담하기와 괴롭히기 등 고통스러운 따돌림이 생겨나는 이유는 증오나 사악함 때문이 아니다. 바로 '소속감의 욕구'때문이다. 대부분의 왕따는 집단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런 짓을 하는 아이 하나하나와 대화를 나눠보면, 대다수가 거기 합류한 이유는 유대감과 소속감을 유지하기 위함이라고 답변한다. 집단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해 보임으로써 집단으로부터 인정을 받고자 하는 것이다. 

 

9장 나는 남과 다르지 않다, 나는 비정상이 아니다

내가 나라고 느끼고 바라보는 나는 '진짜 나'인가 / 어디까지 정상이고, 어디부터가 비정상인가? / 수치심이 한 인간을 파괴하는 늪, 중독 / 종교적 신앙은 수치심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 '진짜 나'를 끌어내어 사랑하고 존중하는 법

단절은 수치심, 두려움, 비난의 원인이자 결과다. 분리, 벽쌓기, 전형화 등이 모두 단절의 유형이다. 그리고 하나가 더 있는데, 더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것, 바로 '자기 자신과의 단절'이다.

남들 생각에 휘둘려서, 남들이 바라는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한 나머지 '자아감각'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내가 나라고 느끼고 바라보는 나는 '진짜 나'인가]

수치심은 주위 사람들에게 나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 걸 주저하게 만든다. '진짜 나'가 되고자 하는 노력에 훼방을 놓는 것이다. '남들이 나를 보는 시선'을 통제하려 하면서, 진짜가 될 수는 없다. 남들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만 하면서, 나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딘 헵위스, 로널드 루니, 제인 로슨은 '진짜 나'가 된다는 것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자연스럽고 참되고 꾸미지 않고 솔직하고 개방적인 태도로 자기 자신을 타인과 공유하는 것"

결국 수치심때문에 '진짜 나'를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남들이 어떻게 볼까',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에 신경쓰다 보면 솔직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다.

 

[수치심이 한 인간을 파괴하는 늪, 중독]

소금물이 갈증을 부르듯 중독은 수치심을 중독을 부른다. 중독과 수치심은 떼여랴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리고 서로 매우 유사한다. 둘다 우리로 하여금 단절과 무력감을 느끼게 만든다. 중독에 빠지면 폐쇄적이 되거나 반대로 과격해지는 경향이 있다. 중독은 우리를 외롭게 만들고 겉돌게 만든다. 그리고 중독에 대해서는 비밀로 감추고 입을 닫으려는 경향이 자주 나타나난다.

론다 : 똑같은 상황에서 어떤 사람들은 수치심을 느끼지만, 어떤 사람은 죄책감을 느낍니다.  수치심 성향과 죄책감 성향도 유동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변할 가능성이 있죠. 그래서 심리치료를 통해 수치심 성향에서 벗어나 죄책감 성황이 될 수 있도록 돕고자 합니다.

 

[종교적 신앙은 수치심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종교적 신앙, 믿음과 수치심의 관계는 복잡하다. 신앙/종교는 어떤 이들에게는 수치심 촉발제가 되기고 하고, 어떤 이들에게는 수치심 회복탄력성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신이나 보다 높은 존재 또는 영적인 세계와의 관계가 수치심 회복탄력성의 원천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영적 유대감은 많은 이들에게 있어서 수치심 회복탄력성을 갖는 데 없어서는 안될 요소다.

종교가 수치심을 불러 일으키는 이유는 모두 인간들이 만들어내고 해석하나 규칙, 사회공동체적 기대들과 연관이 있다.

지도자 위치에 있는 개인과 집단은 종종 수치심을 통제의 수단으로 활용한다. 그런 일이 반복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이루어지면 조직의 문화는 수치심이라는 토대 위에 만들어진다.

 

['진짜 나'를 끌어내어 사랑하고 존중하는 법]

수치심 연구를 하면서 한 가지 더 알게 된 것은 우리 대부분이 자기 자신에게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다는 점이다. 많은 경우 나 스스로가 나의 수치심 거미줄이 된다. 그러므로 '진짜 나'로 살기 위해서는 자기 수용, 자신과의 유대감, 자기공감을 표현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수치심에 사로잡혀 있으면 변할 수도 없고 성장할 수도 없다. 또한 수치심을 가지고는 우리 자신은 물론이고 남도 변하게 할 수 없다.

무조건 수치심과 단절감의 관점에서 보기만 한다면, 내 행동을 제대로 평가하거나 변화시키기 어려워진다.

 

10장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 편이다.

약해져선 안 된다, 차라리 괜찮은 척하다 죽어라? / 우리는 누구나 사랑받고 소속되어 있다는 행복을 느낄 자격이 있다. / 아무도 우리를, 당신을 쫒아 내지 않았다.

인간은 연대하고 유대감을 나누는 존재인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수치심을 부추기는 문화를 연대의 문화로 바꾸고 싶다면, 우리가 보고 듣고 목격하고 마주치는 모든 일을 '나의 일'로 받아 들여야한다.

 

[우리는 누구나 사랑받고 소속되어 있다는 행복을 느낄 자격이 있다.]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사회공동체적 기대, 그리고 그 기대를 강화하는 암시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남성들에게 쏟아지는 기대와 암시들은 '남자다워야 한다'는 남성상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다시말하자면, 남성과 여성은 '어떻게' 수치심을 느끼는가는 같지만, '왜' 수치심을 느끼는가는 완전히 다라다.

'남들에게 약하게 보여서는 안 된다'

남자들은 거칠고 강하고 인내력있고 능력있고 기선을 제압하고 두려움을 모르고 뭐든 할 줄 아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엄청난 부담감에 짓눌려 산다.

여성들이 겪는 수치심 현상을 설명할 때는 비유적으로 '수치심 거미줄'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남성들에게는 그와 다른 것을 보았다. 남성들이 자신들의 수치심 경험을 설명하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작은 상자'가 떠올랐다. 거칠고 강하고 능력있고 성공하고 두려움을 모르고 기선을 제압하고 뭐든 할 줄 아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기대들로 사방이 꽉 막힌 '작고 좁고 답답한 상자' 말이다.

우리는 보상과 강화와 처벌을 통해서, 남자들을 그 상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끔 점점 더 가둬둔다. '거칠고 강한 모습'을 칭찬하면서 남자들 스스로 그 상자 속에 있게 만들기도 하고 과민한 모습을 드러내거나 감정(특히 두려움, 슬픔, 고민)을 드러내려고 하면 '약하다'는 말로 벌을 줌으로써, 그 상자에서 나오지 못하게 한다. 아직 어린 아이일 때는 이 상자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을 치기도 하는데, 그때조차 부모나 친구들, 사회가 그들의 취약성이나 감정을 대수롭지 않게 취급해버린다.

나이가 들고 몸집이 커지면서 소년이 되고 남자가 될수록, 상자 안은 점점 비좁아진다. 그래서 상자를 빠져나오려고 하면, 우리는 그들에게 나약하다, 연약하다, 겁쟁이다. 무능력하다 같은 말로 수치심을 안겨준다. 연구 참가자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볼 때, 남성상의 기준에서 벗어나려는 남성들에게 가장 상처를 주는 사람들은 바로 '아버지'와 '또래 동성친구들'이다.

 

[아무도 우리를, 당신을 쫒아내지 않았다]

우리가 선택하기만 한다면, 수치심을 이용하지 않고 아이들을 기를 수 있다. 우리 아이들에게 '공감의 기술'도 가르칠 수 있다.

아이를 기르는 일은 수치심의 지뢰밭이나 다름없다. 부모로서 나는 '내가 남에게 어떻게 보일까'에도 예민하게 반응한다. 결국 이 두가지는 모두 나와 아이의 자아존중감에 영향을 미친다. 부모는 자신의 원치 않는 정체성과도 씨름해야 하는 동시에, 아이의 원치않는 정체성과도 씨름해야 한다. 형편없는 나쁜 부모로 보이고 싶어 하지 않고, 아이 역시 나쁜 아이로 보이지 않기를 바란다.

부모는 수치심 회복탄력성뿐 아니라 두려움, 비난, 단절감도 심어줄 수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부모가 수치심을 활용해서 교육하고 훈육하면, 아이는 두려움, 비난, 단절감을 배운다. 잘못된 '행동'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아이 자체에 문제가 있다거나 무시하는 식으로 반응하거나, 남들이 보는 앞에서 아이를 조롱하거나, 단절감을 무기로 아이를 위협하는 모든 행동이 수치심을 활용하는 행동들이다.

부모가 수치심을 직접 활용하지 않는 경우라 해도, 제대로 수치심 회복탄력성을 가르쳐주지 않으면 아이들은 두려움, 비난, 단절감을 경험하게 된다. 학교, 학원, 또래집단에게서 받는 경험으로부터 면역을 만들어 줄 필요가 있다.

 

누구나 유대감을 원한다. 우리 유전자에는 유대감에 대한 욕망이 새겨져 있다. 아기일 때는 생존을 위해 유대감을 필요로 한다. 자라서는 유대감이 정서적, 육체적, 영적, 지적 성장을 의미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인정받고 소속감을 느끼고 자신의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유대감은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단지 지금과 다른 선택을 하는 것만으로 유대감의 문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 지나치게 낙관적인 말로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