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리 엡도 테러 사건에 대한 주석 : 히잡 논쟁의 복잡성에 관해
from 비평 2015.02.08 19:23
일러두기
* 다음 글은 2014-2학기 연세대 신촌캠퍼스 <지구촌시대의 문화인류학> 수업에서 기말대체과제로 제출된 글이며, 따라서 2015년 2월 현재 트위터 상에서 진행되고 있는 샤를리 엡도와 IS를 둘러싼 논쟁에 완벽히 '준비된' 글이라고 볼 수는 없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웹에 올리는 이유는 첫째, 해당 사건을 겨냥하고 쓰여진 글이 아니어도 사건의 배후를 비추는 데에 일조하는 바가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며 둘째,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로서 발언의 책무를 느꼈기 때문이다.
프랑스 히잡 논쟁이 복잡한 이유는 기본적으로 찬반 진영에 각각 상이한 이념들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뿐 아니라 문화적 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일부 좌파들 역시 히잡 착용을 옹호하며, 당사자인 이슬람 여성들 중 일부도 히잡 착용을 고수한다. 히잡 착용 금지 논리를 내세우는 쪽에서도 이러한 혼종이 나타난다. 프랑스를 위시한 서구세계의 우파들이 내셔널리즘을 내세우며 히잡 착용 금지법을 옹호하지만 한편으로 페미니스트들, 젊은 이슬람 여성들 역시 여성 억압적인 문화의 산물로서 히잡을 반대한다. 이처럼 보통 우파적인 것이라 여겨졌던 이념과 좌파적인 것이라 여겨졌던 이념이 각각의 갈래를 드러내며 나뉘어져 있는 상황을 가장 잘 드러내 보이는 것이 히잡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히잡 논쟁에 연루된 이념들을 추적하는 것은 조금은 수고로운 일이다. 하지만 일단 어떤 이념이 어떤 연유로 이 논쟁에 연루되어 있는지를 파악하고 나면 이해하기 그다지 어렵지는 않다. 우선 우파 사이의 대립이라 할 수 있을 이슬람 근본주의자와 프랑스 우파들 사이의 대립을 살펴보자. 현재로서 우파의 주요한 구호 중 하나가 고유한 문화를 지키자는 것임을 생각해 볼 때 이들의 대립은 일면 간단해 보인다. 하지만 고유한 문화를 지키자는 민족주의적 구호가 작동하는 방식이 변화해 온 방식을 생각하면 이 대립도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다. 과거의 극우는 고유한 문화를 지키기 위해 확장적인 태도를 취했다. 자국의 문화가 우월하며 따라서 보편적인 것이기에, 필연적으로 전체주의나 제국주의와 결합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과거 제국주의 열강 중 하나였던 프랑스의 우파들이 외부의 문화에 대해 취하는 태도는 과거와는 달리 수세적이다. 그들은 이제 보편적인 것을 말하기보다는 특수한 것, 프랑스 고유의 것에 대해 말한다. 자신의 것을 퍼트리기보다는 배타적으로 자신의 것을 지키려 드는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이슬람은 열등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여기는 이슬람 국가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역사적인 맥락 없이 우리가 이 상황을 제대로 독해하는 일은 어렵고 복잡하다. 더욱이 한국에서 반세계화를 주장하는 단체나 개인이 대체로 좌파이기 때문에 우파가 반세계화를 주장한다는 이야기는 일견 낯설 수밖에 없다. 한국은 제국주의 열강이 아닌 식민지였고, 때문에 과거 제국주의 국가 우파들의 행로와 한국의 그것은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앞에서 우파들의 구호로 소개했던 “고유한 문화를 지키자”는 세계화 시대의 다원주의의 주요한 구호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자본의 침투에 맞서 고유한 문화가 사라지고 있으며 이를 최대한 지켜내야 한다는 것, 더불어 ‘그들’의 문화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다원주의의 주장이다. 몇몇 좌파들은 이러한 다원주의 논리에 입각하여 히잡 착용에 국가가 간섭할 권리가 없으며, 히잡 착용 금지법은 타 문화에 대한 일방적인 억압일 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 제노포비아적이기도 하다는 주장을 펼친다. 물론 앞서 서술했듯이 히잡 착용 금지법에 극우들이 관여했기에 거기에는 제노포비아적인 구석이 있으며, 이방인의 문화에 대한 억압으로서의 측면 역시 존재한다. 그러나 “고유한 문화를 지키자”는 구호를 극우와 다원주의자들이 모두 공유하는 것 역시 사실이다. 하나의 구호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용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이 히잡 논쟁에서의 진영 구분을 어렵게 한다.
이렇게 복잡한 논쟁을 하나의 논점으로 정리할 수 있을까? 어려워 보이지만 세계화와 문화의 관계에 대한 입장 차이를 중심으로 두면 이 논쟁은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것이 된다. 프랑스 우파와 이슬람 근본주의자, 좌파 다원주의자는 모두 세계화로 인해 문화가 손상된다는 믿음을 공유한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세계화를 반대하거나, 적극적으로 세계화를 반대하지는 않더라도 세계화로 인해 손상되는 문화적 요소들에 천착한다. 히잡 논쟁이라는 사안에서 보면 이들은 서로 다른 쪽에 서 있지만, 더 높은 곳에 올라서서 보면 이들의 주장은 결을 같이하는 측면이 있다. 이를테면 프랑스 극우와 이슬람 근본주의자는 본질적으로 같다. 이들이 대립하는 이유는 단지 각기 다른 국가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거나, 적어도 그렇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원주의자도 이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 다원주의적 주장은 본질적으로는 공허한 수사법과도 같다. 여러 의견이나 문화가 공존해야 한다는 말은 어떤 의견이나 문화에도 우위를 부여하지 않는데, 심지어 극단적인 다원주의는 전지구적 합의를 이룬 규범norm에 대해서도 상대주의적인 태도를 취한다. “옳고 그른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판단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 궁극적인 다원주의적 태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고 그름의 각축장인 정치의 영역에서 아무런 효력도 없는 언설이다. 이 때문에 이 수사법은 프랑스 극우와 이슬람 근본주의자, 좌파 다원주의자의 주장을 각각 변호할 수 있는 것이며, 그들 모두의 주장을 다원주의의 전제인 “세계화로 인해 문화가 손상된다”라는 진술로 포섭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다원주의자들의 대척점에 서 있는 진영은 무엇일까? 바로 페미니즘 진영이다. 그/녀들은 제국주의적 세계화도, 그보다 온건한 단순한 세계화주의도 옹호하거나 신뢰하지 않는다. 히잡 논쟁에서 페미니스트들의 진술은 “히잡은 여성 억압의 산물이므로 금지되어야 한다”라는 당위적 문장에 그친다. 이 당위적 문장은 여성해방이라는 보편적 윤리를 호출하지만 제국주의적 우파의 보편성처럼 폭력적이지 않으며, 다원주의자들의 언설이 방기했던 가치판단을 간결한 당위성으로 압도한다. 세계화와 문화가 여러 방식으로 공모하는 여러 방식 중 하나가 무의미한 다원주의적 언설을 일종의 전지구적 규범norm처럼 퍼트려, 보편적 윤리에 반하는 문화조차 다원적 세계화의 이름으로 정당화시키는 것이라는 사실에 입각해 볼 때 이들의 주장은 불온하고도 강력하다. 보편적인 규범을 주장하는 것, 나아가 보편성을 말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 되어가고 있는 전지구적 현실에서, 한때 '보편적이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던 여성의 목소리가 진실로 보편적인 윤리를 제시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히잡 논쟁은 기본적으로 복잡하다. 그러나 이 담론은, 적절한 방식으로 재맥락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복잡한 것이기도 하다. 문제를 바라보는 지점을 기계적인 찬-반이 아닌 제3의 지점에 두었을 때, 독해하는 자가 자신의 위치를 바꿈으로서 시선 역시 바꿀 수 있을 때 비로소 히잡 논쟁을 의미롭게 독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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