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호-21
체크리스트 통치 VS 관계 그물망 짜기
체크리스트 통치
나의 학급 운영 비법 중에 하나는 체크리스트다. 촘촘하게 아이들을 교육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 체크리스트의 항목은 ‘지각’, ‘수업시종’, ‘급식잔반’, ‘수업 중 지적’ 으로 분류되어 있다. ‘지각’은 8시 40분 이후에 오는 학생을, ‘수업시종’은 수업종이 울린 후에 교실에 들어오는 학생을, ‘급식 잔반’은 음식을 남긴 학생을, ‘수업 중 지적’은 담당교과 교사로부터 지적을 당하는 학생을 체크하게 되어 있다. 체크리스트는 매주 통계를 내서 다음 주 청소 당번에 반영한다. 체크리스트 관리는 모든 학생들이 번호대로 일주일 주기로 돌아가면서 담당하고, 체크리스트를 맡은 사람은 체크리스트 키퍼라고 부른다.
체크리스트 덕분에 수업 종소리가 나면, 우리 반 학생들은 미리 자리에 앉아 있거나, 후다닥 교실로 뛰어 들어온다. 체크리스트 통치는 우리 반에서 매우 강력하게 작동된다.
덕분에 나는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하지 않고, 단지 체크리스트로 나타나는 객관적이고 명료한 통계를 바탕으로 학생들을 지도한다. 사적인 감정을 섞을 필요도 없고, 매우 이성적으로 통치한다. 오 우~ 역시 오랜 경륜에서 나오는 노련함이란~ 스스로에게 축하를~^^
관계성 예금계좌의 파산
그런데 체크리스트 통치에 도전하는 일들이 발생했다. 체크하는 학생과 체크당하는 학생 간에 실랑이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8시 40분(교실 시계 기준)에 교실 문으로 한 발만 들어왔어도 지각인지 아닌지, 급식 잔반은 양념까지 다 먹어야 통과인지, 수업 시종이후 몇 분까지는 입실로 봐줘야하는지 ….
나는 체크리스트와 관련한 학생들의 민원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체크리스트 키퍼의 윤리성에 대한 문제도 제기됐다. 평소 친한 친구는 규칙을 어겨도 봐주는 반면에, 관계가 좋지 않은 친구에게는 과잉 규제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학생이 키퍼가 되면, 자신이 당한 만큼 돌려주는 일도 발생했다. 그리고 키퍼인 자신이 규칙 위반했을 때는 하나도 기록하지 않는 일도 생겼다. 아이들의 부정 부패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힘이 센 학생의 규칙위반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힘이 없어 자기 목소리 내지 못하는 학생은 완전이 동네북이 되어, 모든 비난과 원망이 그 학생에게 집중되었다.
우리 학급의 대부분 분쟁의 씨앗은 체크리스트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나는 체크리스트 통치가 공정하게 적용되도록 키퍼를 감시하고, 힘이 있는 학생을 힘으로 누르고, 아이들의 민원에 판결을 내려주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했다.
'아, 정말 지겨워. 요즘 애들은 정말 성실하지 않아. 거짓말도 잘하고, 어쩜 그렇게 이기적이지. 정말 요즘 애들은 문제야. 왜 스스로 알아서 하지 못할까...'
나의 에너지 소진과 함께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에궁….
회복적 관점에서 보면 생활교육이란 수표로 찾는 당좌예금 계좌와 비슷하다. 만약 예금계좌에서 수표로 돈을 다 인출해 쓰고는 더 이상 입금하지 않는다면 예금주는 파산할 수 밖에 없다. 학생들이 지도를 받을 때 인출은 ‘관계성’이란 계좌에서 이뤄진다. 이 관계성 계좌는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 안에서 형성된 존중과 상호책임, 우정 등에 기초를 두고 만들어 진다.
우리 학급의 관계성 계좌는 파산의 지경에 이르고, 쪽박을 차야 하는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악의 소굴이 따로 없을 정도로, 온갖 부정과 비리, 서로에 대한 미움과 비난 등등, 폭력적인 문화가 세워지고 있었다.
교사가 만든 환경이 학생의 반응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급식 시간에 두 학생이 잔반 검사 과정에서 실랑이가 붙더니, 결국에는 서로 욕하고 멱살을 잡는 일이 벌어졌다. 점심도 편안하게 먹지 못하는 내 신세를 한탄하면서 아이들을 불러서 혼을 냈다. 그리고 무조건 키퍼에게 복종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씩씩거리면서 서로를 째려본다.
체크리스트 통치를 통해 우리 반 아이들은 일상적이고 반복적으로 무엇을 경험했을까?
감시, 지적, 비난, 배제, 응당한 처벌에 대한 필요성, 동료에 대한 적 이미지, 힘의 논리, 분노, 억울함….
아이들은 교사로부터 일방적으로 제공받은 학급 구조 속에서 서로 경쟁하고 비난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학급규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학생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자 하는 교사가 일방적으로 결정한 학급 구조 속에 있었다. 교사가 만들어 놓은 환경 속에서 학생들은 나름의 처세술과 삶의 원리를 배우고 있는 것이다.
관계 그물망 짜기, 문제해결 서클
회복적 생활교육은 안전한 관계 그물망을 통해 서로 돌보는 평화로운 공동체를 세우게 된다.
그런 관점에서 학급 규칙은 관계 그물망의 중요한 씨줄과 날줄의 역할을 한다.
우선, 학급 규칙은 교사나 힘이 있는 구성원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필요와 요구를 확인하고, 학생들이 스스로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탐구하는 과정을 통해 ‘공유된 목적과 약속’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해볼 만하다. 많아야 몇 시간만 투자하면 만들어지는 작품이다. 그 다음이 문제. 이 규칙들은 학생들의 일상을 간섭하게 될 것이고, 다양한 반응들이 생기게 된다. 잘 지켜질 수도 있고, 지켜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규칙 자체가 적절하지 않을 수 있고, 규칙을 집행하는 과정이 공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째든, 학급 규칙이 지켜지지 않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학급규칙이 학생들의 목소리가 반영된 것이라고 전제했을 때, 회복적 질문을 통해 문제해결 서클을 시도해 볼 수 있다.
- 회복적 질문을 통한 문제해결 서클
회복적 질문
1) 무엇이 일어났니?
2) 그때 너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니?
3) 그 이후로 무슨 생각했니?
4) 네가 한 일로 누가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어떤 방식으로?
5) 일을 바르게 하기 위해 너는 무엇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니?
6) 우리가 너를 위해 무엇을 도와주기를 원하니?
문제행동 : 급식을 자주 남기는 행동
교사 : 진수야, 급식 잔반과 관련해서 너와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어.
진수 : …
교사 : 급식을 남길 때 무슨 생각이 들었니?
진수 : 정말 먹고 싶지 않다고 생각 했어요.
교사 : 급식 버리고 나서는 어떤 생각이 들었어?
진수 : 또 잔소리 듣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음식을 남기는 것이 좀 미안하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교사 :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 민수가 급식을 남기는 것이 다른 사람에 영향을 줄까? 영향을 준다면,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하니?
진수 : 음. 잔반 남기지 않기는 우리 반 규칙인데, 규칙이 깨지게 되고.. 더 넓게 보면, 자연 환경을 오염시키는 결과가 되겠죠.
교사 : 그래, 그럼, 민수는 우리 반 규칙이 지켜지고 자연환경도 보호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니?
진수 : 급식을 남기지 않을게요. 그리고 애초에 제가 먹을 양만큼만 음식을 가져 오겠어요.
교사 : 선생님이나 우리 반 친구들이 진수를 위해 무얼 도와줄까? 어떤 도움이 필요해?
진수 : 저는 특별히 양파를 정말 못 먹어요. 억지로 먹지 않는 반찬을 가져가도록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교사 : 그래 고맙다. 먹을 양만큼만 음식을 가져 오는 것이 중요할 것 같구나. 네가 못 먹는 반찬이 있다면 미리 얘기해주렴. 그리고 음식을 골고루 먹기 위해 노력했으면 좋겠다.
눈먼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도다.
-마태복음 23장 24절.
문제해결 서클은 교사로 하여금 학생을 대상화하지 않으면서 존중의 프레임으로 생활교육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즉 비난이나 강압의 방식이 아니라, 학생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고 자발적으로 책임을 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줄 수 있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교사는 아이들과 잘 지내면서 잘 가르치고 싶어 한다. 그런데, 교사의 열정과 열심이 학급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뒤돌아보기는 쉽지가 않다. 나의 체크리스트 통치는 한 동안 학급 안에 질서와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어느 새 나는 규칙에 집착하게 되었고, 규칙을 지킨 학생보다는 규칙을 어긴 학생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이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애쓸수록 학급은 배려와 존중으로부터 멀어져 갔고, 공동체의 안전망인 관계성은 약화되어 갔다. 그리고 나는 이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학생들에게 돌리고 있었다. 마치 눈먼 인도자처럼, 껍데기를 쫒느라 더 중요한 본질을 잃어버리는 꼴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특별히 교사는 학급의 구조를 구축할 때, 그 구조가 가치를 잘 담아내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가치를 생산하고 있는지 면밀히 성찰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주님, 나의 열정과 노력이, 경쟁논리를 정당화하거나, 폭력을 악순환하거나, 지배체제를 유지시키는 것에 기여하지 않도록 도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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