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교사운동 저널 2014년 7월호
세월호 참사가 교육에 던지는 경고
당신의 안전과 생명은 무의식적 반응에 달려 있다.
-수라 하트
지배구조의 수동적 교육 메카니즘, ‘가만 있으라’
2014년 4월 16일 인천에서 출발해 제주로 가던 6천 825t급 청해진 소속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해상에서 침몰했다. 이 배에는 수학여행 길에 오른 경기도 안산 단원고 학생 325명, 교사 15명, 일반 승객, 승무원 등 모두 476명이 탔으며 차량 150여대도 싣고 있었다.
세월호는 빠른 속도로 기울기를 시작하여 완전히 뒤집힌 채 2시간여 만에 침몰했다. 구조자 174명을 제외하고는 300여명이 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났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16명의 실종자가 차디찬 바다 속에 남아있다.
이번 사고로 교사로서 가장 괴로운 것은, “가만 있으라”는 지시에 잘 따랐던 학생들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사실이다.
사고 후, ‘가만 있으라’는 말은 세월호 참사에 대해 분노의 촛불을 든 시민들의 저항문구가 되었고, 기성세대의 가슴을 쑤시는 아픈 창끝이 되었다. 수학여행을 인솔했던 13명의 교사들도 돌아오지 못했다. 배가 기울어져 물이 차오르는 죽음의 공포 속에 있었을 학생들과 그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던 동료교사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나 아프다.
내가 세월호에 있었다면, 나는 어떤 말을 했을까? 나 역시 선장이 방송을 통해 전달된 그 말, ‘가만 있으라’라고 말했을 것이다.
수라 하트가 “당신의 안전과 생명은 무의식적 반응에 달려있다”고 말한 것처럼, 위기의 상황에서 대부분의 우리는 무의식적 반응에 의존하게 된다. 절체절명의 순간 나 역시 나의 무의식적이고 습관적인 패턴으로 반응했을 것이고, 그것이 ‘가만 있으라’였을 것이다.
적어도 그 당시 ‘가만 있으라’는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러면, 나의 ‘가만 있으라’는 무의식적 반응의 저변에는 무엇이 깔려 있는가? 나는 어떤 무의식 속에 갇혀 있고, 그러한 무의식을 형성하고 강화한 교육과 문화와 사회시스템은 무엇인가?
그건 바로 위계질서와 통제를 강조하는 권위주의적이고 지배구조적인 사회 시스템이다. ‘가만 있으라’는 지배구조와 억압하는 시스템을 재생산하는 수동적 교육 메카니즘이다.
답을 전달하는 교사
이제껏 교사들은 답을 전달하는 역할을 충실히 해왔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객관적이고 절대적이라고 여기는 지식을 학생들에게 주입시키고 암기하도록 했다. 주어진 문제에 대해 질문하거나 비판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질문과 비판적 사고는 정해진 답을 찾는데 헷갈리게 하여 머리만 아프게 할 뿐이다. 파울로 프레이리의 비유처럼 학생들은 빈 그릇이며, 교사는 지식을 빈 그릇에 채워주기만 하면 된다. 교사는 훈련을 시키고 학생은 훈련을 받는다. 교사는 말하고 학생은 듣는다. 학생은 인격체이기보다는 대상일 뿐이다. 학생은 미숙하므로 교사의 말에 순응하고 따라야 한다. 학생은 인식의 주체가 아니다.
입시교육에 맞추어져 있는 우리나라 교육에서 성공하려면, 이러한 은행저금식교육을 충실히 하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는 지식에 대해 질문하거나 탐구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한 지식이 우리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 가고 있고, 어떤 변화들을 가능하게 하는지 성찰할 필요가 없다. 교사는 단지 주어진 ‘지식’을 다양하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학생들에게 열심히 전달하기만 하면 된다.
“노예는 질문하지 않는다.” 좀 극단적 표현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질문하지 않는 배움은 억압하는 사회구조를 유지시키고 강화시킨다. 결과적으로 민주주의와 멀어지고 지배구조적인 사회시스템을 재생산하게 된다.
교사로서 내가 반복하고 있는 시스템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성찰하거나 저항없이 순응함으로 인해 지배구조문화가 유지, 강화되고 또 나와 똑같은 다음 세대를 낳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학생의 필요를 묻고, 교육적으로 풀어가기 위해 연구하라!
통제는 지배자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이루어진다. 정부가 국민을 통제하는 것도, 정부의 필요를 위해서이지 국민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교실은 이 세상의 축소판이다. 교실에서의 통제 역시 교사의 필요를 위해서이지 학생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세월호사건 이후에 교육과학부에서는 학교를 단속하기 위한 많은 공문을 내려 보냈다. 그래서 교사 간에도 세월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매우 불편한 일이 되었고, 아이들 간에도 세월호로 인해 각자의 의견을 솔직하게 말하는 일이 없다. 외형적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을 보내고 있는 듯 한데,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도 보기에 불편하기만 하다. 그러던 중 작은 사고가 발생했다. 고1 남학생이 카톡에 “나라면 밖으로 나갔을 텐데, 바보 같다.”는 말을 남겼는데 그것이 페북에 까지 올려졌다. 그로인해 그 학교의 학생 여러 명이 그 학생에게 몰려가서 욕설과 비난하였고, 그 충격으로 그 남학생은 중간고사 시험을 마치자마자 전학을 갔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 모두에게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충격적인 일을 당했지만, 그 일에 대해서 자유롭게 말하는 것은 통제가 되었다. 무척 애달픈 일이다. 세월호 참사는 학생들에게 교육적으로 다루어져야 할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교육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분출될 수 밖에 없다.
좋은교사운동에서 배포한 애도수업안을 바탕으로 고2학생들과 수업을 진행했다.
학생들에게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느꼈던 마음과 떠올랐던 생각들을 자유롭게 나누도록 했다. 무책임한 선장과 선원에 대한 분노, ‘미안해’라는 말만 수십 년째 하는 어른들, 안전보다 돈을 더 중요시했던 청해진사람들, 지도력없는 정치인들, 거짓된 언론, 무능력한 해경, 자신이 세월호에 갇힌 꿈을 꾼 일, 사건이 있던 날 친구들과 떡볶이를 먹으며 즐겁게 보낸 일로 미안한 마음…. 대부분의 학생들은 분노와 슬픔을 느꼈다며 눈물을 보였다. 그런데 그 중에 두 명은 특별한 느낌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공감능력이 부족한 것인지 염려했다. 사람마다 경험하는 감정이 다를 수 있고, 다른 느낌과 생각들을 솔직하게 말하고 공유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해주었다. 애도수업이 어떤 특정한 감정을 느끼도록 강요하는 수업이 된다면, 이것 역시 억압하는 시스템의 도구가 될 것이다.
세월호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통제하기 보다는, 오히려 안전한 대화의 장을 열어놓고 서로 다른 의견일지라도 존중하는 분위기 속에서 허심탄회하게 말하는 기회를 갖는 것이 더 건강하고 교육적이다. 내면을 억압하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나 공동체를 위해서나 위험하기 때문에, 안전한 대화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 우리 모두를 돕는 일이다.
정권의 필요나 교사의 필요도 존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교육현장에서는 학생의 필요를 묻고 학생들의 필요를 어떻게 교육적으로 풀어가야 할지 깊이 연구해야 한다. 그것이 교사의 역할이다.
교사가 진정으로 고민해야 할 것은, 모든 주어진 지식들이 절대적인 답인 양 착각하지 말고, 그 대신에 지식이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맥락적으로 이해하고 탐구하고 질문해야 한다. 그리고 학생들의 필요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 필요를 교육적으로 풀어갈 수 있도록 부지런히 연구해야 한다. 학생들에게 답을 외우게 하지 말고, 질문하게 해야 한다. 지식을 암기하는 것은 침묵의 문화를 낳는다. 너무나 뻔한 것에도 비판적으로 질문하고 탐구하도록 안내해야 한다. 교사와 학생은 주객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배움과 성장에 대해 공동 책임을 지는, 진리에 대한 공동 탐구자이다.
세월호 참사가 교육에 던지는 경고
세월호 유가족이 우리사회에 호소하고 있는 것은 ‘잊지 말아주세요’였다. 잊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교사는 무엇을 잊어서는 안 될까?
-‘가만 있으라’를 멈추라.
-모든 진리에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라.
-대화하라, 대화는 객체를 주체로 변화시킨다. 대화는 사랑이다.
-교사는 학생들의 필요를 묻고, 교육적으로 풀어가기 위해 고민하라.
우리의 교실이, 통제가 아닌 서로 다른 다양한 의견이 존중받고 서로 의견들이 건강하게 소통이 되는 장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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