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진짜 자기"란 무엇인가?
-우리의 절대적인 정체성
-우리의 영혼
-하느님 안에 있는 우리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
-본래적으로 만족하며 불평이 없다.
-불멸하는 것으로 느끼며 또한 불멸한다.
-위대한 자기, 그리스도 자기, 하느님 자기, 붓다 자기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자기
... 여러분도 아마 알아치라기 시작하셨겠지만, 내가 영혼과 진짜 자기를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것 같지만, 영혼과 진짜 자기는 서로 조금 다르다. 어떤 점에서 영혼과 진짜 자기는 우리의 "영원한" 한 부분, 진리를 아는 우리의 일부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서로 교환해서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진짜 자기에는 성령과 성령의 나타나심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진짜 자기와 영혼은 모두 하느님께서 우리들 안에 심어놓으신 불멸의 다이아몬드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 둘은 보통 하나처럼 작동한다. 우리는 신적인 DNA,즉 우리 안에 깃든 신의 뜻과 절대적 알짬으로 시작되었다. 이 신적인 DNA는 우리에 관해 진실을 알고 있으며, 우리 존재의 깊은 저장고 속에 간직된 청사진이며, 앞으로 펼쳐지고 차츰 성취되어 그 자체를 드러낼 하느님의 형상이다. 로마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느님의 형상이 당신의 심장 속에 성령으로 부어졌으며, 당신에게 주어졌습니다."(5:5) 45쪽
2장 "가짜 자기"란 무엇인가?
-우리의 상대적인 정체성
-우리 인생의 출발을 위한 연장통
-우리가 스스로 만든 정체성
-변하고 죽는 자기
-본래적으로 궁핍하며 깨지기 쉬운 자기
-다른 사람들의 눈에 맞추어 사는 삶
-나쁘거나 "거짓된"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것
-자기 폐쇄적이며 자기중심적
-불만족스럽고 항상 다시 고쳐 만드는 자기
-변화되기 이전으 '소아'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은 자기"
-땅에 떨어진 밀알 "하나"
-우리의 따로 떨어진, 분리된 자기
-사라졍만 하는 환상
67쪽
그리스도교는 상당 부분 가짜 자기의 죽음을 오해하고 또한 가짜 자기의 죽음을 회피하기 위해 도덕주의적 종교가 되었으며, 많은 사소한 것들을 "희생하는 것이" 경건이라고 오해하는 종교가 되었다. 우리는 이렇게 희생하는 것이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린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실제로 그 위선을 꿰뚫어보시고, 희생이나 거짓 관대함을 이상적인 것으로 간주하거나 희생이나 거짓 관대함을 통해 보상을 기대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거부하셨다. 나는 다른 책에서 그것을 "희생이라는 신화"라고 불렀다. 희생은 보통 은밀하게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도록 만들며, 공적을 쌓기 위한 악순환을 영속화시키는 데, 이것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내주었거나 실천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게 만드는 사고방식이다.
68쪽
예수님은 분명히 "'내가 원하는 것은 희생이 아니라 자비이다'라는 말의 의미를 배워라"하고 말씀하셨다. .. 예수님은 희생이라는 생각이 주로 우리의 가짜 자기에 호소하는 것으로서, 진짜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지만, 거의 언제나 사람들과 대부분의 제도들과 호전적인 국가들이 남용하고 조작하는 것이 바로 희생이라는 점을 간파하셨다. ... 금욕적인 행동들은 사회적으로 또한 개인적으로 상당한 보상을 받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경건하거나 관대한 행동을 하지 말도록 가르치셨다. ... 그분들은 가짜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 본질적이라고 지적하셨는데, 이것은 항상 본질적인 죽음이다. 이것이 영적 여정의 핵심에 있는 것이다.
71쪽
대부분의 기관들과 국가들이 "영적인" 죄들을 칭송하며 보상하며, 또한 여러 형태의 교만과 탐욕이 흔히 승진과 칭송을 받게 된다는 것은 슬프지만 사실이다. ... 성서에서 "세상"은 서로 아첨하고 가짜 자기를 항상 보상하는 체제이다. ... 에고가 가장 싫어하며 두려워하는 것이 변화이다. 가짜 자기는 다른 수많은 것들에 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기도 하고 도덕적일 수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내가 멋있게 보이기 위해 필요한나"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우리들 모두가 배운 대로 어떤 종류든 보다 높은 도덕적 위치에 오르려고 노력하는 것은 흔히 가짜 자기의 죽음을 회피하는 방법이다 .
3장 무엇이 죽고 누가 사는가?
87쪽
종교적인 가까 자기는 심지어 인종차별, 노예제도, 전쟁, 완전한 부인 혹은 속임수를 정당화할 수 있으며 전혀 아무런 죄의식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느님을 위한 거룩한 의무를 수행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에고가 매우 거룩한 핑계를 찾은 것이다. 바로 이때문에 우리는 종교인이 되는 것에 매우 조심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종교가 우리의 의식을 변화시켜 함께 아파하는 마음을 지니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종교는 문제자체이지 결코 해결책이 아니다. ... 가까 자기의 죽음에까지 인도하지 못하는 종교는 쓸모없는 종교이다. 가짜 자기가죽어야 진짜 자기가 산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가지 않으면 성령이 올 수 없다" 이것은 분명하지만 통렬한 소식이기도 하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가 살아나시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죽으셔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변형의 패턴이지만, 본래의 "훌륭한 사람"을 내려놓는 것이 항상 엄청난 신앙의 도약인 이유는 그가 너무 "훌륭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4장 체험이라는 칼끝
94쪽
우리가 탐구하는 방법이 우리가 무엇을 발견하는지, 또는 무엇을 발견하기를 원하는지를 결정하게 마련이다. 우리는 일차적으로 상징, 은유, 성스러운 이야기들처럼 보편적이며 지혜로운 전통 속에서 깊고 영훤한 의미 혹은 개인적 진리를 찾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영원한 철학 전통이라는 말의 의미이며, 조지 버나드쇼가 "오직 하나의 종교만 있으며, 그것의 수천가지 형태들이 있다"고 말한 이유이다. 부활처럼 가장 훌륭한 종교적 은유들은 단지 그리스도교의 진리만이 아니라 보편적인 진리를 주장한다. 은유만이 신비에 관해 정직하기 때문에, 은유는 종교가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이다. 서로 다른 종교들과 교파들이 전하는 기본 메시지는 흔히 거의 서로 동의하는 것이지만, 그들은 신과 일치한 자신들의 체험을 전달하기 위해 서로 다른 이미지들을 사용한다. ... 예수님은 명료하지 않은 영적 진리를 가라치기 위해 탁월한 은유들을 사용하신다. ... 은유는 언제나 더욱 많은 의미를 다는 것이지 적은 이미지를 담는 것이 아니다. 문자주의는 의미의 가장 낮고 최소한의 단계이다. ...
103쪽
부활은 죽음에서 해방되는 보편적인 패턴이다. 세개의 아브라함의 종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하느님을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분"(로마서 4:17)으로 보았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처럼 "그리스도의 신비" 속에 계시된 성육신, 죽음, 부활의 패턴은 나사렛 예수가 태어나기 오래 전부터, 별들이 태어나고 죽는 때부터, 이 행성 위를 생명체들이 덮기 시작한 때부터 참된 것이었다.
105쪽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삶-과 역사 자체-을 찔러서 열어 제침으로써 우리가 명확하고 피할 수 없는 길을 가도록 만드는 칼 끝이다.
나는 완전한 그리스도의 신비가 진짜 자기의 전체 여정을 위한 지도, 즉 신적인 잉태, 사랑받는 자로서의 지위, 십자가 처형을 거쳐 부활에 이르는 전체 여정을 위한 지도라고 믿는다. 카를 융은 그리스도교를 자주 비판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일어난 일은 항상 어디에서나 일어난다." 그는 그리스도를 "자기의 원형"이라고 불렀다. 나는 이것이 진실이라고 깊이 확신한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당신이 이 지도를 따라 걷는 것을 요구하지도 않고, 이처럼 심원한 패턴을 그리스도인의 참된 영적 삶으로 인정할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저 하나의 클럽에 가입하는 것에 불과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비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참된 신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이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존중하며 살아낸다. 우리가 러시아에 대한 정확한 지도를 갖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러시아를 방문했던 것은 아니며, 또한 우리는 지도가 없이도 러시아를 충분히 체험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신비는 여전히 훌륭한 지도이다.
106쪽
내가 부활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나의 기질적인 낙관주의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며, 예수님의 큰 기적을 말하는 것도 아니며, 그리스도교가 참된 종교라는 증거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며, 어둠 속에서 경적을 울리라고 부추기는 것도 아니며, 심지어 죽음이후에도 삶이 있다는 것이 확증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이런 것들보다 훨씬 더 변하지 않으며 보편적인 무엇에 관해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정신과 마음과 몸속에서 길을 볼 수 있다면, 부활은 거의 모든 것, 심지어 우리가 매우 증오하는 것들조차도 새롭게 부활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108쪽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성육신->죽음->부활->승천이라 부르지만, 이것은 우리 모두에 관한 것이며 또한 모든 피조물에 관한 것으로서, 개체로 태어나지만 다시 하느님에게, 모든 존재의 근거 속으로 되돌아간다는 진리이다. 이런 순환적인 전체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도록 만들며, 생명을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게 만든다. ..
109쪽
부활한 그리스도는 모든 진짜 자기의 최종적 관점을 대표한다. 즉 인간적이며 동시에 신적인 한 존재로서 그 자체로부터 하느님을 바라보는 존재이지만, 당신 안에 계신 하느님이 당신 너머에도 계신 하느님을 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며, 또한 당신 자신과 하느님이 모두 선하며 일치해 있다는 것을 큰 기쁨으로 누리는 존재가 바로 모든 진짜 자기의 최종적인 모습이다.
110쪽
부활은 성육신의 논리적 결론이자 완전한 결말이다. 부활은 이 세상, 이 육신, 이 물질성이 영원한 진리의 한 부분이며 영원히 하느님에게 중요한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인간의 최종적이며 완전한 운명에 대한 영원한 이콘이다. 그분은 우리가 짊어진 모든 십자가에 대해 하느님께서 어떻게 하실 것인지에 대한 서약이며 보증이다. 마침내 우리는 소망을 갖고, 뜻 깊은 삶을 살 수 있다. 세상은 더 이상 부조리하거나 비극적이지 않다. 우리가 받은 상처들은 이제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을 간직한 집이 되었다.
116쪽
모든 기도훈련은 머리와 가슴과 몸이 하나로 작용하도록 훈련시키는 것이며, 이것이 생각을 완전히 바꾼다. ..
119쪽
나는 부활이 역사를 그 분명한 결론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도록 초대하며 유혹하는 커다란 네온사인이라고 생각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떼이야르 샤르댕 신부가 묘사하려 했던 것처럼, 시간과 역사의 오메가 포인트로서, 우리에게 죽음이 아니라 사랑이 영원한 것임을 계속 상기시켜주는 하느님의 밝은 빛이며 유혹이다.
5장 당신이 그분입니다.
128쪽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에 간격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악마적인 것이다.
128쪽
거의 모든 종교들에서 도덕주의는 신비주의에 대한 가장 흔한 대체물이며 위조품이다.
129쪽
내가 말하는 도덕주의란 사적인 완전을 위한 테크닉이나 제의를 뜻한다. 도덕적 성취는 언제나 채찍위의 당근이 된다. 즉 항상 우리가 성취하기 힘든 임의적이며 반쪽만 진실한 목표인 것이다. 도덕주의는 하느님과 합일하는 체험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
도덕주의에 치중하는 종교집단에서는 언제나 그 집단에 속하지 않는 외부인들을 분명하게 배척한다. 이처럼 잘못된 도덕적인 순결성 속에 숨는 것이 바로 노예제, 성차별주의, 그리스도인 황제들과 성직자들과 시민들의 탐욕, 어린이들에 대한 이상 성욕, 민족의 정복, 원주민 문화에 대한 억압 등이다.
132쪽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은 우리가 그 일을 해야만 하거나 그 일을 하지 않을 때 받게 될 처벌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그 일이 참된 일이기 때문이다.
145쪽
우리를 "하느님의 형상과 닮음으로 지으셨다"는 창세기의 본문이 뒷바침한다. 많은 신학 저술들은 이 인용문을 명료하게 설명하기 위해 기록되었으며, 학자들은 이것에 합의했다. "형상"은 우리의 객관적 DNA로서, 우리가 어떤 옳은 일을 하거나 잘못을 지지를 수 있기 이전에 애당초부터 우리를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특징짓는 객관적인 DNA라고 정의되었다. 이런 하느님의 내주하심은 완전히 거저 주시는 선물이며 지속적인 현존이었다. 이것은 우리 안에 살아계신 성령으로서 때로는 "창조되지 않은 은총"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 선물을 받은 "성전들", 그릇들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의 내주하심은 우리의 노력과 전혀 상관없지만, 우리의 핵심 정체성에 관해 모든 것을 말해준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타고난 존엄성을 주는데, 그것을 나는 이 책에서 우리의 진짜 자기와 우리의 불멸 다이아몬드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것인 "구원의 반석"이다. 우리 안에 거하는 하느님의 형상은 우리들 각자 안에서, 마치 천천히 소화되는 초강력 비타민처럼, 우리를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도록 만든다. 이것이 바로 "원복"이다. "닮음"은 다른 것을 뜻햇다. 닮은 하느님의 형상이라느 ㄴ완전히 거저 받은 선물을 우리가 개인적으로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과 점차로 실현하는 것이었다. 우리 모두는 객관적인 똑같은 선물을 받았지만, 우리가 주관적으로 어떻게 그 선물에 대해 긍정하는가 하는 것에서는 서로 매우 다르다.
146쪽
보다 행동적이며 외향적인 서방교회는 사람들의 외적인 모습들이 하느님과 전혀 닮지 않았다는 것만 볼 수 있었으며, 신비적인 중심대신에 도덕적인 성취에만 주목했다. 루터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일이란 그가 말한 것처럼, 고작 "똥 더미 위에 눈을 살짝 덮는 것"이었으며, 칼뱅이 우리에게 제공한 것은 "전적 타락"과 "선민의 예정"뿐이었다. 이처럼 본래적으로 부정적인 인간론 속에서는 어떤 신화도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가 애당초 그처럼 큰 빚더니에 올라 있는데, 무엇을 재건하겠는가?...
147쪽
우리가 하느님과의 실제적인 합일, 진정한 변형, 실질적인 참여에 대한 의식을 상실했기 때문에, 우리는 대체로 진짜 자기에 대한 생각도 상실했다.
6장 그것이 진리라면, 어디에서나 진리이다.
7장 총부리 앞에서의 각성
8장 만물과 친밀하게
9장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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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일 동안 읽은 책이다. 생각을 정리하기에 내겐 좀 어렵게 다가온다.
그래도 내게 다가온 중요한 메시지는
1. "부활은 죽음에서 해방되는 보편적인 패턴이다." "
2.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인간의 최종적이며 완전한 운명에 대한 영원한 이콘이다. 그분은 우리가 짊어진 모든 십자가에 대해 하느님께서 어떻게 하실 것인지에 대한 서약이며 보증이다.
3.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삶-과 역사 자체-을 찔러서 열어 제침으로써 우리가 명확하고 피할 수 없는 길을 가도록 만드는 칼 끝이다.
4.하느님의 내주하심은 완전히 거저 주시는 선물이며 지속적인 현존이었다. 이것은 우리 안에 살아계신 성령으로서 때로는 "창조되지 않은 은총"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 선물을 받은 "성전들", 그릇들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의 내주하심은 우리의 노력과 전혀 상관없지만, 우리의 핵심 정체성에 관해 모든 것을 말해준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타고난 존엄성을 주는데, 그것을 나는 이 책에서 우리의 진짜 자기와 우리의 불멸 다이아몬드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것인 "구원의 반석"이다. 우리 안에 거하는 하느님의 형상은 우리들 각자 안에서, 마치 천천히 소화되는 초강력 비타민처럼, 우리를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도록 만든다. 이것이 바로 "원복"이다.
내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부활하신 예수님은 내게 삶의 원형을 보여주셨고, 참된 삶의 증거이다. 인생의 정답이다.
부활은 죽음을 전제로 하며, 이 죽음은 에고의 죽음이다. 가짜 자기의 죽음없이 진짜 자기로 갈 수 없다.
즉,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으로 부터 해방되는 보편적인 패턴이다.
나는 오늘 무엇이 죽어야 하는가?
이기심, 경쟁, 이분법적 사고, 적개심,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
나의 존재 근거는 무엇인가? 나의 구원의 반석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내주하심이다. 내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 나는 성전이다.
나는 그 일을 왜 하는가?
그것이 내게 유익을 주어서가 아니다. 처벌이 두려워서도 아니다. 그 일이 참된 일이기 때문이다.
[부활은 성육신의 논리적 결론이자 완전한 결말이다. 부활은 이 세상, 이 육신, 이 물질성이 영원한 진리의 한 부분이며 영원히 하느님에게 중요한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인간의 최종적이며 완전한 운명에 대한 영원한 이콘이다. 그분은 우리가 짊어진 모든 십자가에 대해 하느님께서 어떻게 하실 것인지에 대한 서약이며 보증이다. 마침내 우리는 소망을 갖고, 뜻 깊은 삶을 살 수 있다. 세상은 더 이상 부조리하거나 비극적이지 않다. 우리가 받은 상처들은 이제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을 간직한 집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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