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커뮤니케이션에 대하여
-세계를 하나로 연결해주는 발전된 시스템에도 불구하고 커뮤니케이션은 오히려 유례없는 규모로 붕괴되고 있다. 경제 혹은 정치체제가 다른 국가 사람들은 전쟁이 아니고서는 소통할 기회가 거의 없다.
-커뮤니케이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사람들이 자기 집단 이외에 다른 사람들의 말에는 거의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커뮤니케이션의 의미는 '공통의 ' '공유의'의 라틴어 'commum'에 접미사 'ie'를 붙인 형태다. 접미사 'ie'는 'fie'와 유사하며 '만들다' 혹은 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커뮤니케이션의 동사 형태인 '전달하다'의 한 가지 의미는 '뭔가를 공통으로 만든다.'이다. 즉 정보나 지식을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 가능한 정확한 방식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참가자들이 편견이나 상대에게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가 없이 상대의 말에 자발적으로 귀를 기월여야 한다.
-자신의 기존 생각과 의도를 버리고 다른 것을 택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양쪽이 서로에게 고정된 정보를 전달하듯이 특정 개념 또는 관점을 전달하려고 든다면 커뮤니케이션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협력한다면 분명히 공통된 어떤 것을 창조할 수가 있다.
-과학자의 생각과 자연계에서 관찰된 내용에 공통되는 새로운 뭔가가 끊임없이 출현하면서 과학자의 작업이 그렇게 진행된다. 인간과 인간이 사는 전반적인 환경에 공통되는 새로운 구조들이 끊임없이 창조된다.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혹은 힘을 모아 공동 행동을 하기 위해서 모인 자리에서 참가자들 각각이 자유로운 듣기를 '가로 막는' 자기 내면의 미묘한 두려움과 희열을 감지하고 의식할 수 있을까? 이런 의식 없이 들리는 모든 내용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자신을 다그쳐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지만 참가자들이 전달되는 내용에 적절한 주의를 기울이는 한편으로, 커뮤니케이션을 '가로막는' 내면의 움직임에도 온전히 주의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새로운 무엇을 창조할 수 있으리라.
2. 대화에 대하여
-어떤 집단 안에서 모임을 꾸릴 생각이라면, 먼저 대화에 대한 토론 혹은 세미나르 ㄹ열라고 말해주고 싶다.
-대화라는 영어 'dialogue'는 그리스어 'dialogos'에서 유래했다. 'logos'는 말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말의 의미'라고 생각할 수 있다. 'dia'는 영어로 'though', 즉 '통과하여', '사이로' 등의 의미다.
-어원을 통해서 보면 우리 내부와 사람들 사이를 통과하여 흐르는 '의미의 흐름'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대화'는 전체 집단안에서 의미의 흐름을 가능하게 해주며, 이를 통해서 새로운 이해가 출현할 가능성도 있다.
-이렇게 집단 구성원들 사이에 공유된 의미는 사람과 사회를 하나로 묶어주는 '접착제' 혹은 '시멘트' 역할을 한다.
-토론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경기에서 이기는 것이다.
-하지만 대화에서는 누구도 이기려고 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이기면 결국 모든 사람이 이기는 격이다. 대화의 정신은 토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대화에서는 점수를 얻으려는 시도도, 자신의 견해를 지배적인 견해로 만들려는 시도도 없다. 오히려 누군가의 실수를 발견하고 시정하면 전원이 점수를 얻게 된다. 모두가 승자가 되는 소위 말하는 윈윈상황이다.
-커뮤니케이션을 아주 힘들어 한다. 이유가 뭘까?
우선 한가지는 모든 사람이 서로 다른 가정과 의견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피상적인 가정이나 의견도 있지만 근본적인 것들도 포한된다. 삶의 의미, 자신의 이익, 국가의 의익, 몸담고 있는 종교의 이익에 대한 가정들, 진정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가정 등등..
-여기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대화는 이런 가정들 이면에 있는 모든 압력들을 고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화는 가정 자체가 아니라 이면의 사고 과정을 고찰해야 한다.
1) 대화와 사고
-우리가 갖고 있는 다른 의견들은 예전 사고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의견이 도전받으면, 자신이 공격받는 것처럼 느낀다. 이처럼 의견은 각자의 가정이고 각자의 경험에 불과한데도 '진리'처럼 느껴지는 경향이 있다.
-대화의 목적은 전체적 사고 과정을 고찰하고, 집단적으로 일어나는 사고 과정을 바꾸는 것이다.
-생각, 즉 사고로 인해 야기되는 어려움들을 예로 들어볼까한다. 대표적인 것이 '파편화'인데 이는 사실이 아니라 사고에서 기인한다. 모든 것을 나누고 구분하는 것이 바로 사고다. 실제로 세계는 하나로 통합된 그림자 같은 존재다.
-나누고 분리하는 파편화는 분명 사고에서 기인한 어려움 중에 하나다. 하지만 속내를 보면 보다 깊은 원인이 있다. 사고는 적극적으로 많은 일을 하고 있는데, 사고 과정은 사고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사고는 그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알려줄 뿐이라고. 우리 주변의 거의 모든 것이 사고에 의해 결정된다. 건물, 공장, 농장, 도로, 국가, 과학, 기술, 종교... 언급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 사고의 산물이며 사고에서 비롯된다.
-사고는 결과를 만들어 내지만, 자기가 한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게 바로 문제다 . 더욱 난감한 것은 사고가 만들어낸 산물들 중에 일부를 인간이 무척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고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개인적 사고와 집단적인 사고. 개인적으로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사고의 많은 부분은 공동으로 이루어진다. 알고 보면 사고의 대부분이 집단적인 배경에서 나온다. 일단 언어라는 것이 집단적이다.
-문화 전체를 보면 해당 문화의 성립에 영향을 준 엄청나게 많은 가정과 의견들이 있다.
-인간의 일반적인 사고를 빛에 비유하자면 당연히 비간섭성 빛이라 할 수 있다. 온갖 방향으로 분산되어 있고, 서로 대립하고 반목하기 때문이다. 빛의 경우에는 이를 비간섭성이라고 했지만 인간 사고에서는 비일관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비일관성을 버리고 일관된 방법으로 함께 사고한다면, 레이저 광선처럼 엄청난 힘을 갖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권장하고 주장하는 내용이다. 우리가 진정한 의미의 대화 상황에 있다면, 다시 말해 상당한 기간에 걸쳐 대화를 계속하고, 그런 과정에서 구성원들이 서로 익숙해진 그런 상황에 있다면, 일관된 사고와 커뮤니케이션 활동이 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사고는 우리가 인지하는 명시적인 차원에서 일관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막연한 느낌만 갖고 있는 암묵적인 차원에서도 일관성을 가질 것이다. 사실 명시적인 일관성보다 암묵적인 차원에서의 일관성이 더욱 중요하다.
2)대화에 참가하기
-대화의 기본 개념은 아마도 사람들이 둥글게 앉는 것이리라. 이런 자리 배치는 누구도 특별한 대우를 하지 않으며, 참가자가 누구와도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원칙적으로 대화는 이끄는 지도와 의제없이 진행되어야 한다.
-퍼실러테이터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자신이 없어도 대화가 원활히 진행되고 모임이 굴러가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일단 규칙적으로 만나 대화를 계속해야 한다.
-꽤 오래전에 북아메리카 어느 부족과 오랫동안 생활을 같이했던 인류학자가 있었다.... 부족은 때때로 둥글게 모여 앉았다. 그들은 그저 계속 이야기할 뿐 특별한 목적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어떤 결론을 내리지도 않았다. 모임을 이끌고 대화를 주도하는 지도자도 없었다. 부족원이면 누구나 참석할 수 있었다. 발언을 하면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은 소위 지혜자로 통하는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누구한테나 발언권이 있었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던 대화가 어느 순간 아무런 이유없이 멈췄고 사람들이 흩어졌다. 하지만 그런 모임이 끝나고 나면 모두가 자기 할 일을 깨닫는 것 같았다. 이유는 대화를 통해 서로를 충분히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어서 그들은 소집단으로 모여서 결정을 내리거나 뭔가를 실행에 옮겼다.
-대화집단에서는 뭔가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려 하지 않는다. 이는 대화집단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그렇지 않으면 참가자들이 자유롭게 말할 수 없다. 뭔가를 해야 하고,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하고, 말할 것과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이 정해져 있는 상황에서 자유로운 대화란 불가능하다. 그런 것들로 부터 자유로운 공간이 있어야 한다. 이런 대화집단은 열려 있고 자유롭다. 그야말로 비어 있는 공간이다. '여가'라는 단어도 빈 공간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여가의 반대말인 '바쁘다'는 의미의 영언 단어 'occupied'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공간이 차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대화 집단에서는 무엇이든 들어올 수 있는 빈 공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대화를 끝내고 나서는 그저 비우면 그만이다. 대화 집단은 뭔가를 축적하려 하지 않는다. 이 또한 대화에서 중요한 점 중에 하나다. 크리슈나무르티가 말한 것처럼 '뭔가를 담으려면 컵이 비어 있어야 한다.'
-대화 집단의 진정한 목표는 진실 안에서 일관성 있는 소통을 하는 것이다.
-대화에서는 아무런 의제도 제시하지 말아야 하고, 유익한 성과를 거두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중요한 것은 영원히 존속되는 불변의 대화 집단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가져올 만큼 충분히 오래 지속되는 대화집단을 만드는 것이다. 대화집단을 너무 오래 유지하면 타성에 빠질 우려도 없잖아 있다.
-내가 말하는 대화는 항상 즐거운 오락거리도 아니고, 눈에 띄게 유익한 뭔가를 내놓은 것도 아니다. 어려워지는 순간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어려우지는 순간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화의 지속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의미를 공유하는 일이다. 사회란 사람과 조직들의 연결망 같은 것이다. 사회 덕분에 우리는 함께 살 수가 있다. 하지만 사회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우리가 같은 문화를 갖고 있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의미를 공유한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의의, 목적, 가치 등을 공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는 붕괴된다. 현재 우리 사회는 일관성이 없으며 의미의 공유도 원활치 않다. 과거에는 잘했는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우리가 가진 각기 다른 가정들이 암묵적으로 의미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3) 가정 유보
-가정을 유보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가정들을 가져오되 그대로 따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억누르지도 않는 태도다. 가정들을 믿지도 않고 그렇다고 불신하지도 않는다. 좋다 혹은 나쁘다고 판단하지도 않는다.
-전체 집단이 참가자 각각에게 하나의 거울이 된다. 여러분도 다른 사람에게 일종의 거울 역할을 하고, 다른 사람도 역시 여러분에게 일종의 거울 역할을 한다. 이런 과정 전체를 관찰하는 것이 상황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모두가 같은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 이처럼 가정들을 유보한 다음에는 대화에서 오가는 생각, 신체의 느낌, 감정들 사이에 연관성을 파악해야 한다. 유심히 관찰하려면 구도 발언 뿐만 아니라 몸짓을 비롯한 신체 언어에서도 우리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다만 다른 쪽에 있을 뿐이다.
-참가자들이 어떤 결론이나 판단도 내리지 않고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이해하는 것도 내가 생각하는 대화의 중요한 부분이다. 대화가 계속되면서 가정들이 드러난다.
4) 필요로 인한 충동
-실질적인 사고 과정과 사고가 일어나는 순서에 귀를 기울이고 세심하게 관찰하고 관심을 쏟는 것, 사고의 비일관성과 적절히 기능하지 않는 부분에 주의를 기울이는 모든 것이 정말로 중요하다. 지금 우리는 뭔가를 바꾸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의식하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고 중에 하나가 바로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필요하다'함은 다른 방식으로 대체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가정에서도느 대화 집단에서든 심각한 언쟁은 모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관점이 다른 데서 발생한다.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언제든 필요에 관해 협상을 하고, 무엇이 최우선인가를 결정하고 조정할 수 가 있다.
-결국 문제는 이처럼 다른 절대적인 필요들이 충돌할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이다. 우선 나타나는 것은 감정적인 반응이다. 분노, 증오, 좌절 같은 강렬한 감정이 고조되는 것이다.
-절대적 필요라는 개념이 얼마나 가공할 위력을 지녔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대화에서도 절대적인 필요가 등장하고, 서로 충돌하는 상황이 발생할 있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해결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은 일단 그런 상황을 피하려 하고, 그런 질문들을 회피한다. 하지만 대화를 계속하다 보면 그런 상황이 등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느냐다. .. 사람들이 대화를 계속하면 전체적인 태도가 바뀌게 된다. ... '이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에 참으로 많은 것이 파괴되고 있다.' ...창조적으로 더불어 대화 전체가 창조적인 새로운 영역으로 진입한다. 나는 이것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사고가 그들을 움직이고 있는 것읻. 그러므로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원하는 것이 사고에 의해 결정되고, 거기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집단을 운영할 새로운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으며, 여기에 요구되는 것이 바로 창조성이다.
-어떤 가정에 도달했을 겅우, 그것이 절대적인 '필요'를 주장하는 가정이라면, 바로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교착상태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대처해야 한다.
5) 사고의 자기수용감각
-사고의 문제점을 기억하고 있는가? 사고는 어떤 일을 하고 자기가 한 일이 아니라도 말하는데, 거기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자기가 한 일이 아니라고 할 뿐 아니라, 그것들이 '문제'라고 비난하기까지 하니 적반하장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경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문제'를 만들어내는 사고를 계속하고 있는 한은 해결이 불가능하다. 어찌 보면 사고는 자신의 행위로 인한 결과를 의식해야 마땅하지만 현재는 그렇지 못하다. 자신의 행위와 그로 인한 결과를 인식하는 기능은 신경생리학에서 말하는 '자기수용감각'과 관련되어 있다. '자기수용감각'을 달리 표현하자면 자기지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사고도 자기수용감각을 갖고 자기 의도와 행동을 인식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사고가 생기고, 사고가 느낌을 야기하고, 느낌이 다시 생각하려는 다른 의도를 발생시키는 식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과정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고가 혼자 저절로 생기는 것처럼 보이며, 감정도 혼자 저절로 생기는 것 같다.
-내가 강조한 유보의 핵심도 이런 자기수용감각이 가능하도록 만들자는 것이다. 유보를 통해서 겅루 속에 비춰보는 것처럼 자신의 사고 결과를 볼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의도를 봐야 한다. 뭔가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낌과 동시에 충동은 물론 그것이 가져올 결과까지 인지하는 것이다.
-사실 인류의 모든 문제가, 사고가 자기수용감각을 상실한 데서 기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사고는 그런 식으로 끊임없이 문제를 만들어내면서 한편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사고가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킨다. 사고가 문제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과 결과를 자각하지 못하는 사고를 하면 할수록 더욱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개인뿐만 아니라 집단 차원에서도 사고의 자기수용감각이 필요한데, 대화는 이를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사회에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다.
6) 집합적인 참여
-대화의 목적은 사물을 분석하는 것도 아니고 논쟁에서 이기는 것도, 의견을 교환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의견들을 유보하고 관찰하는 것이다. 모든 참가자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들을 유보한 다음 무슨 의미인가를 보는 것이다. 일단 모든 의견이 의미하는 바를 알면, 거기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공통된 내용을 서로 공유하게 된다. 모든 의견을 이해한 다음에는 다른 방향으로 보다 창의적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단지 의미에 대한 이해만 공유할 수 있다. 그리고 거기서 진실이 예고없이 나타난다.
-이런 상황에서는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의식이 출현할 수가 있는데, 바로 참여하는 의식이다. 의식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며, 참여에 거리낌이 없는 그런 의식이다.
-모두가 공통의 의미를 공유하면 함께 참여하게 된다. 마치 음식을 나누어 먹듯이 공통의 의미를 나누어 가지게 된다. 모두가 참여하여 의사소통을 하고 공통의 의미를 창조한다.
-집단 정신과 개인 정신이 모두 존재하며, 그 사이에는 개울과 같은 흐름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의견들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최종적으로 우리는 이런 의견들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최종적으로 우리는 이런 의견들 사이의 어딘가에 있을 것이며, 동시에 그것들과는 무관한 새로운 방향으로 그것들을 넘어서서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새롭고 창조적인 무언가를 향하여.
7) 새로운 문화
-문화란 바로 공유한다는 의미다.
-나는 방금 사회는 공유하는 의미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공유하는 의미가 곧 문화를 이룬다고 말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만약 우리가 일관성 있는 의미를 공유하지 못하면 훌륭한 사회를 만들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전체 의미가 일관되지 않으면 우리가는 결코 진실에 도달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이다. 과거와 현재의 모든 의미들이 함께 존재한다. 먼저 그것들을 파악하고 그대로 두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떤 종류의 질서가 생길 것이다.
-사회가 제대로 기능하고 존속하려면 의미 공유와 일관성으로 이끄는 이런 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 전체가 붕괴될 것이다. 공유하는 의미야말로 사회를 진정으로 하나로 묶어주는 시멘트다. 그런 면에서 보면 지금 우리 사회는 아주 질이 낮은 시멘트로 접착되어 있다. 저질 시멘트로 건물을 지으면 금세 금이 가고 결국에는 무너진다. 지금 우리에게 역할을 제대로 해줄 질 좋은 시멘트와 접착제가 절실하다.
8) 대화의 어려움
-대화 과정에서 마주치는 어려움이 있다. 일단 의견이 다양하다는 자체가 좌절감을 주며, 불안감도 있을 수도 있다. 고집스럽게 자기주장만 하는 사람들도 있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이런 부분에서 그렇게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지 않다. 이런 사람들은 잔뜩 위축되어 말을 아끼는 경향이 있고, 지배하고 군림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들과 만났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자신이 없는 사람들은 혹여 웃음거리가 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이다. 다른 사람들은 각기 다양한 역할을 받아들인다. 어떤 이들은 지배하는 역할을 택하고, 어떤 이들은 지배당하고 약하고 무력한 역할을 선택한다. 각자의 가정 및 의견에 토대를 두고 있는 그들의 '역할'이 원활한 대화 진행에 지장을 준다. 더욱 어려운 문제는 사람들이 한시바삐 자신의 주장을 전달해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충동, 즉 압박감을 느낀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발언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고, 자신이 대화에서 소외되었다고 느낀다. 바로 이런 초복적인 이유 때문에 커뮤니케이션 전체가 붕괴된다.
-대화에는 엄격한 '규칙'은 없다. 하지만 진행하다보면 유용한 원칙들을 자연히 터득하게 된다. 누구든지 발언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도 그중에 하나다.
-대화는 특정 목적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대화 자체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대화 방식이라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굳이 함께 할 이유가 없다.
9) 대화의 비전
-증오는 신경생리 상으로나 화학 반응 상으로나 상당히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상태이며, 현재 이것이 세계적인 풍토병이 되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만큼 널리 퍼져 있다. 모든 사람이 각자의 가정을 갖고 있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가정을 고집하며, 모든 사람이 감정적으로 불안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사람의 본질적인 측면은 동일하며, 표면적인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런 경우 집단에서 서로가 하나로 연결된 듯한 일종의 '접촉경기'를 경험할 수 있다. 사고 과정이 신체 과정의 연장선상에 있고, 때문에 모든 신체 언어가 사고 과정을 보여주게 된다.
-사람들이 서로 진정으로 긴밀한 접촉을 유지하는 상태에서 자신에게 아주 중요한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되면, 온몸을 동원하여 표현하게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가슴과 뇌, 신경, 온갖 호르몬까지 그야말로 모든 것을 동원하게 된다고.
-만약 특정 집단의 구성원 모두가 서로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되 그것들을 판단하지 않은 채로 유보하고, 각자의 의견을 타인의 그것과 동일한 선상에 둔다면, 우리는 '한 마음' 즉 '일심'이 된다. 모든 의견과 가정을 공유하게 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다른 차원의 유대감, 즉 '비개인적인 유대감'을 갖게 된다는 사실이다.
-긴밀한 연결, 진한 동료애, 진정한 상호참여를 경험하고 느끼게 된다.
-총동대로 실행하는 것을 유보하고, 가정들을 유보하고 자세히 관찰한다면, 우리는 모두 같은 의식 상태에 있게 된다. 많은 이들이 원한다고 말하는 그것, 공통의식을 갖게 된다. 대화가 마냥 즐겁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해야 하는 이유다. 공통의식을 지복, 즉 더 없는 행복의 공유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럴 수도 있다. 어쨌든 거기에 도달하는 방법은 분명코 이런 과정, 즉 대화를 통해서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우리가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의식을 공유해야 한다. 절망을 공유하고, 각기 다른 모순된 가정들을 공유하고, 서로를 향한 분노를 공유하면서도 대화를 계속한다면, 모두가 함게 분노하면서 그런 상태를 함께 관찰하고 숙고한다면, 우리는 분명 원하던 공통의식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가 지키려 하는 의견들 안에는 엄청난 폭력성이 숨어 있다. 단순한 의견이나 가정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와 동일시하는 것들이다. 그것들을 지키는 것이 스스로를 지키는 것과 같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 집착한다. 정글에 위험한 맹수가 있듯이 지금 세상에는 위험한 의견들이 있다.
-이런 자기방어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 한은, 폐쇄적인 태도로 자신의 가정만을 고수하면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한은, 인간의 지성이 제구실을 하기 힘들다. 지성은 본인의 가정을 고수하지 않는 열린 태도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의식의 공유가 의견 같은 구체적인 내용보다 중요하다. 어차피 의견들은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으며, 해답은 의견이 아니라 다른 어딘가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진리는 의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분명 다른 어떤 것에서 나온다. 아마도 암묵적인 정신의 보다 자유로운 활동에서. 그러므로 진리를 인식하려면, 즉 진리에 참여하려면, 우선 의미들이 일관되게 만들어야 한다. 내가 대화가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의미가 일관성이 없다면, 진리에의 참여는 불가능하다.
-나는, 대화는 정신 과정의 암묵적인 차원에서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가장 중요한 일들이 일어나는 바로 그곳에서.
-앨버트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 그들은 진리에 이르는 방법에 대해서 서로 다른 가정과 의견을 갖고 있음을 확인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보어의 판단은 양자론에 토대를 두고 있었고, 아인슈타인의 판단은 상대성 이론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차리를 확인하자마자 그들이 서로에게 등을 돌렸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두 사람은 보통 이상의 참을성을 가지고 해당 주제를 되풀이해서 토의했다. .... 아인슈타인과 보어는 각자 자신의 의미가 진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어떤 의미도 공유하지 못했다.
-진리의 개념에 유념해야 한다. 대화가 진리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 대화를 통해서 진리에 도달할 수도 있지만,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미다. 의미가 일관성이 없으면 결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의미와 진리를 공유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다르게 행동해야 한다. 보어와 아인슈타인은 대화를 했어야 한다. 그들의 대화가 실제로 가능했을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그들이 대화를 했다면, 그들은 서로의 의견에 온당한 주의를 기울였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의견을 유보하고, 상대성이론과 양자론을 넘어서 새로운 어떤 것으로 나아갔을지도 모른다.
-전체는 너무 방대하다. 어떤 사고로도 전체를 파악할 방법은 없다.
-집단이 공동 사고 단계에 도달하면 모든 것이 하나의 과정인 양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구성원들은 함께 하나의 사고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어서 누군가가 다른 가정을 제기하면 모두가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의미를 공유한다. 바로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대화의 비전'이다.
10) 대화에서의 민감성
-어느 시점에 어떻게 끼어들지, 미묘한 각종 단서와 분위기를 포착하고, 그에 대한 스스로의 반응을 관찰하는 방식이 바로 민감성이다. 말하자면 자신의 내면과 집단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민감하게' 포착하고 파악하는 것이다.
-행위자가 일부러 하는 행동이 아니라도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다. 이런 것들도 모두 커뮤니케이션의 일부다. 커뮤니케이션이란 언어로 나타날 수도 있고 비언어적인 행동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을 감지하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의미, 혹은 의미의 부재를 민감하게 감지하는 것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이것을 '의미 인식'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의미는 전체 현상을 하나로 연결하고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의미는 '시멘트'다. 그렇다고 의미가 시멘트처럼 굳어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대화에서 의미는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일반 상황에서는 사람들이 각자의 가정을 고수한다. 그런 상황에서 함께 생각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민감성을 가로막는 것은 각자의 가정과 의견을 고수하려는 태도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화 집단에서는 사람들이 서로를 비판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그저 모든 가정과 의견들을 관찰하고 드러나도록 내버려둔다.
11) 한계가 있는 대화
-상하관계나 권위는 대화 정신에 반하는 것이다.
-정해진 목적도 의제도 없는 것이 대화다. 해야 하는 일이 없다면 권위나 위계질서가 필요하지 않다. 대화에 진정 필요한 것은 오히려 권위나 위계질서가 없는 공간, 특별한 목적이 없이 비어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비어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 논의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이.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문제들을 종식시킬 정치적인 해답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대화에서 특정 의견들이 중요하지 않듯이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해답이 아니다. 오히려 대립을 완화하고 마음을 열어 모든 의견을 살펴보는 태도가 중요하다. 그런 태도가 조금씩이라도 퍼지면 파멸의 속도를 늦출 수 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지금까지 우리는 자신의 의견과 가정들을 공유하고, 타인의 가정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경우, 그들의 반목이 폭력으로까지 번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보통은 타인이 자신의 근본적인 가정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폭력적이라도 느끼기 쉽고, 스스로도 폭력적인 방향으로 기울기 십상이다. 때문에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타인의 가정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가 중요하다. 대화는 다양한 의견과 가정을 집단적인 방식으로 드러나게 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12) 대화를 넘어서
대화에서 우리가 이처럼 일관성 있는 높은 에너지를 발산할 경우, 단순히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집단 이상의 뭔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 내부에서 새로운 변화가 가능해지고, 우주와의 관계에서도 변화가 가능해질 것이다. 이런 에너지는 흔히 '영적교감'이라고 불려왔다. '참여'의 일종이다. 초기 기독교들이 그리스어로 'koinonia'라고 부르던 것인데 어원이 바로 '참여하다'이다. 전체를 나누어 가지고 동시에 거기에 참여한다는 의미다. 집단 전체뿐만 아니라 그야말로 우주 전체에.
3. 집합 사고의 본질
-이런 문제는 특정한 사고방식에서 비롯된다. 앞에서 언급한 파편화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파편활르 지향하는 사고는 사물을 조각조각 부수는 경향이 있다. 파편화 사고는 실제로 분리되지 않은 것들까지 어떻게든 부수려고 한다. 부품은 전체를 이루는 부분이지만 깨진 파편은 서로 무관하게 아무렇게나 존재하는 조각들일 뿐이다. 애초에 한 덩어리이던 것들이 그렇지 않은 것처럼 취급된다. 이는 잘못된 사고의 특징 중 하나다.
-사고와 관련된 문제는 눈에 훤히 드러나는 명시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포착하기 힘든 미묘한 문제이므로 따라서 더욱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
-사실 진정한 위험은 눈에 보이는 사건들, 즉 전쟁, 범죄, 약물, 경제 위기, 오염 등에 있지 않낳다. 진정한 위험은 그것들을 만들어내느 사고 안에 있다. 특정한 경우가 아니라 항상 그렇다. 누구든 그런 사고에 대해서 뭔가를 할 수가 있다. 누구나 사고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중대한 오류에 빠져있다. 우리는 항상 이렇게 생각한다. "저런 모든 것들을 생각하는 것들은 그들이지 내가 아니야. 나는 올바르게 생각하고 있다고." 나는 이런 태도야말로 잘못이라고 본다. 사고는 우리 안에 스며들어 있다. 이는 바이러스와 비슷한 상황이다. 어찌보면 세계 곳곳에 사고, 지식, 정보의 질병이 퍼져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컴퓨터, 라디오, 텔레비젼 보급이 늘어날 수록 이런 질병들은 더욱 빠르게 퍼진다. 우리 주변에서 진행되는 잘못된 사고가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모두의 내면에서 자라기 시작한다. 이는 바이러스처럼 확산되고, 개인들은 바이러스에 영양분을 제공하고 무럭무럭 키우고 있다. 이런 바이러스 확산을 멈출 면역체계를 우리가 갖추고 있는가? 이를 막을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안지하고 인정하고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사고를 관찰하기 시작하는 순간 문제의 근원을 보게 된다.
-사고 전체 과정에서 뭔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이 원인이며, 이는 집단적이다. 말하자면 우리 모두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의문을 품어야 하는 핵심 가정은 사고가 개인의 것이라는 가정이다 사실 어느 정도까지는 그렇다. 우리는 어느 정도 사고의 독립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보다 신중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일반적인 형태의 사고 대부분이 사실은 개인적이지 않다는 것이 나의 견해다. 이는 전체 문화에서 시작되어 개인에게 스며들었다.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부모, 친구, 학교, 신문, 책 등등에서 사고를 취한다. 우리가 거기에 변화를 주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사고 자체는 사회의 공통 사고에서 나온다.
-여러 대의 컴퓨터가 한곳에 집적된 지식을 공유하듯이 인류 전체가 사용하는 집적된 공동지식이 존재한다. 이런 집적된 사고는 수천 년 동안 발전해왔고 온갖 내용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지식, 즉 사고는 그런 모든 내용을 알고 있지만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는 모른다.
-사고는 기억으로부터 나온 반응이다.
-우리 문화가 사고와 과거의 느낌들에 대해서 잘못된 해석을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고와 과거의 느낌은 하나의 과정이며 분리된 둘이 아니다.
-이성적인 사고를 하려면 원활히 돌아가는 차분한 뇌가 필요한데 그렇지 못했다. 이런 경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상황은 악화된다. 더욱 잘못된 방향으로 유도하고 괴롭게 만들 그런 사고들만 쌓이게 된다.
-사고 과정은 집단적이면서 동시에 개인적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방식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며, 우리는 실제로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고 있지 않다. 우리가 사실을 보고 있지 않다는 그것이 사실이다. 진정 고차원적인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직접적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파악하고 인정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사고는 우리가 경험한 것의 표상을 보여 주는 능력이다. 사고의 이런 속성에 주의를 기울이고 깊이 생각한다면, 개념과 이미지들이 그렇게 강력한 영향력을 갖는 이유를 보다 깊이 통찰할 수 있으리라. 영어단어 representation은 이런 맥락에서 참으로 적절한 단어라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은 글자 그대로 다시 제시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일차적인 인식이 뭔가를 제시하고, 사고는 그것을 추상적인 형태로 다시 제시한다.
-가치 있고 흥미로운 것으로 표현되지 않으면 그렇게 제시되지 못하고, 따라서 관심을 끌지 못한다. 그러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사물을 표현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과정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나쁘다"고 말하고 여러분이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그런 사고로 인한 표상이 직접적인 인식에 기초한 제시 안으로 침투한다. 일단 받아들이면, 그것이 여러분의 내재적인 사고, 즉 암묵적인 사고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다음번에 여러분이 그런 유의 사람을 만나면 입력된 정보가 제시로 떠오르고, '나쁜 속성'이 그 사람 안에 내재된 것으로 인식된다.
-이윽고 사고가 존재를 드러내며, 실제로는 사실이 아닌 '사실들'을 만들어낸다.
-대부분의 표상은 집단적으로 생기며, 그렇기 때문에 엄청난 힘을 갖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무척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많은 집단표상들이(나라, 종교, 제너럴모터스, 자아 등등) 무지개와 동일한 속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엄연한 현실이라고 받아들이는 수많은 것들이 무지개처럼 실체가 없다. 문제는 우리가 집단표상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결과물인 표상을 독립된 사실로 인정하고 그에 걸맞은 가치를 둔다는 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우리가 자신에게 타인을 어떻게 제시하며, 타인에게 자신을 어떻게 제시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이런 모든 것이 일반적인 집단표상에 영향을 받는다.
-제시된 사물은 이미 있는 그대로의 사물이 아니라 사고과정을 거쳐서 무언가가 제외된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알 길이 없다.
-지금 우리 사회와 문화에 널리 퍼진 집단 표상에 맞춰서 세상을 본다. 그러므로 이런 표상들을 버릴 수 있어야 변화가 가능하다. 이전 표상들을 버리면 세상이 다르게 제시될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나에게 위험한 사람으로 제시된다면, 나는 여러분을 보면 위축되고 뒤로 물러서게 될 것이다. 알고 있는 정보가 부정적이므로 그럴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내가 만약 여러분을 다르게 표현한다면, 여러분을 대하는 전반적인 태도가 달라진다. 또한 우리는 잘못된 표상을 주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이런 말을 할 수 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있으므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그러면 상황이 그런 것처럼 제시되고, 우리는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표상에 토대를 두고 있다. 확실한 것은 표상이 아닌 '제시'면에서의 진실한 변화는 존재의 변화라는 사실이다.
-세상이 위험한 이유는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위험하기 때문이 아니라, 널리 퍼진 잘못된 표상 때문이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위험한 인간이라는 방식으로 접근하지 말고, 잘못된 표상의 희생자인 인간이라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표상을 바꾸면 보다 심층적인 변화가 가능해진다.
-개인의 표상을 바로 잡는 일은 물론 좋은 일이다. 하지만 사회의 진정한 변화는 집단 표상이 바뀔 때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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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문제는 사고이다. 사고는 표상을 만들어 낸다. 집단표상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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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문제와 역설
-어떤 사람이 진짜 문제에 직면했는데 문제가 해결되기도 전에 손을 뗀다면 결과는 참탐할 것이다. 진짜 문제앞에서 그런 태도를 보인다면 무분별하고 무책임하거나 진지함이 결여되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이와 달리 마음이 역설을 진짜 문제인 양 취급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역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붙잡혀 있게 된다. 문제는 해결책이 있지만 역설은 해결책이 없기 때문읻.
-인간관계의 단절을 문제라고 말하는 것도 잘못된 접근법이다... 열린 커뮤니케이션의 필요성을 잘 알지만, 한편으로 마음을 닫고 소통을 거부하는 이런 상황이 바로 역설이다. 유사한 역설이 사회 전체, 다른 연령층, 인종, 사회계층, 국가 등등에 광범위하게 작용하며 영향을 주고 있다.
-모든 사회는 징벌 체계를 마련했다. 사람들에게 공포심ㅇ르 주어 옳은 행동을 하게끔 유도하기 위해서다. 모든 사회는 동시에 일련의 보상 체게를 만들었다. 방법은 반대지만 사람들이 옳은 행동을 하도록 유인하려는 목적은 동일하다. 징벌과 보상으로는 불충분하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인류는 각종 종교 교리와 도덕, 윤리 체계를 세웠다. 사람들이 자진해서 스스로의 '잘못된' 혹은 '사악한' 사고와 감정들을 통제할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하지만 이것 역시 진정한 의미에서 바라던 결과를 만들어내지는 못하고 있다. 사실 인간 본성 안의 무질서가 역설의 결과이기 때문에, 이를 문제로 생각하고 대처하는 식으로는 이를 종식시킬 수가 없다 .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마찬가지다. 그런 시도들은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키고, 결국에는 사회에 도움은 커녕 해악을 끼치게 될 것이다 .
-현재 인류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 안에 내재된 무질서를 별개의 문제인 양 다루는 바람에 야기된 어려움들이 가히 폭발적인 비율로 증가하는 그런 상황에 직면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부 상황뿐만 아니라 우리 내부의 무감각과 몰지각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외부로 드러나는 혼란의 심층 원인은 내부의 생각과 감정의 역설인데, 무감각과 몰지각 때문에 이런 역설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적인 작엄과 외적인 작업이 병행되어야 한다. 수백년에 걸친 습관과 조건 형성 때문에 '기본적으로 우리는 항상 옳으며', 우리가 직면한 어려움들은 대체로 외부 원인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또한 이런 어려움들을 문제로 규정하고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도 이미 널리 퍼져 있다. .... 그것이 마치 바로잡아야 할 '문제'를 규정하고 '해결책'을 찾으려 하는 사고활동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 무관한 것인 양 오랜 세월 그런 식으로 사고가 굳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개인 및 사회 문제들을 생각하는 사과 과정 자체가, 사고가 다루는 내용에 영향을 받고 통제되고 있다. 그러므로 사고는 자유롭지 않으며, 진정한 의미에서 정직하다고 할수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강렬한 의식이 다. 분석 대상으로부터 끊임없이 영향을 받는 혼란스러운 사고 과정에서 야기되는 오류를 초월한 의식, 혼란의 원인인 모순되는 전제와 감정을 꿰뚫어 볼 능력이 있는 그런 의식이 필요하다.
-근본적으로는 분할되지 않는 전체를 염두에 두고 삶을 바라보고 지속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지속적으로 진지하고 진중하게 인간 정신의 속성에 주의를 기울이는 태도가 필요하다. 오랜 세월 계속된 부주의와 굳어진 타성으로 인해 정신은 여러 가지 역설에 빠져 있으며, 그로 인해 야기된 어려움을 외부에서 생긴 '문제'로 오인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5, 관찰자와 피관찰자
-인간은 각자의 가정을 통해서 세상을 본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가정이 관찰자라고 할 수도 있다.
-갖고 있는 가정에 따라서 우리는 특정 정보를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수집하며, 이를 특정 방식과 구조로 통합하게 된다.
-가정이라는 '관찰자'는 관찰하는 대상에 심오한 영향을 미치며, 동시에 관찰하는 대상에게 영향을 받는다. 말하자면 상호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점에서는 관찰하는 대상과 관찰자 사이에 거의 구별이 없다.
-여러분이 사회나 타인을 들여다보는 경우에도 여러분의 가정이 관찰 대상에 영향을 미친다. 상대 또한 관찰하는 여러분을 인식하고 감정적인 반응을 보일테고, 상대의 감정적인 반응이 다시 여러분의 관찰에 영향을 주게 된다.
-크리슈나무르티의 표현을 빌리자면, "관찰자가 곧 피관찰자다"
-"나는 지금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말하지만 가정들은 보이지 않는다. 가정들이 보고 있는 관찰자이기 때문이다.
-사고는 이런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렇게 하여 사고가 관찰하는 사람, 즉 생각하는 사람의 이미지로 나타나게 된다.
-저기 뒤편 어딘가에 잘못된 것을 찾으려고 유심히 관찰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그 자신은 관찰당하고 있지는 않다. 문제는 그가 지켜봐야 하는 '잘못된' 것들 자체가 관찰하고 있는 사람 내부에 있다는 것이다. 잘못된 것을 감추기에 가장 안전한 장소이기 때문읻. 관찰자 안에 숨어라. 그러면 그는 영원히 찾지 못할 것이다.
6. 유보, 육체, 자기수용감각
-사실 인류는 유보에 익숙하지 않다. 이것이 인간의 타고난 잠재능력이지만, 그것을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진화하지 않았다. 인류는 오히려 즉각적인 충동에 따라 반응하는 식으로, 말하자면 폭력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쪽으로 진화했다. 폭력성은 끊임없이 증식하는 경향이 있다. 나중에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알아서 돌아가듯이 폭력성이 점점 무의식적으로 나타난다. 나는 이것이 인간이 폭력성을 유보하지 못하고 표출하는 주된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정글에서도 항상 무력이 필요하지는 않다. 사실 유보가 필요한 상황이 대부분이고, 무력이 필요한 경우는 어쩌다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생존에 필요한 것은 무력이나 폭력성이 아니라 오히려 유보하는 태도를 배우는 것이다.
-유보과정에서 두 가지를 깨닫게 된다. 첫째 육체적인 반응이 사고에 의해 야기된다는 사실이다. 둘째, 유보를 통해서 우리는 '나'를 거치지 않고 사고가 감정에 영향을 미치고, 감정이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는 직접적인 증거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에게도 자기참조시스템이 있다. 자기수용감각, 자기지각이라고도 불리는 것이다. 육체를 보면 인간은 자기 몸의 어떤 부분을 움직이면 즉시 이를 알아챈다.
-사고는 자기수용감각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든 사고를 관찰할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육체처럼 사고도 자신을 관찰하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한가? 사고가 자기 행동을 파악한다면, 지금처럼 혼란을 조장하지 않을 것이다 .
-사고가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면, 엄청난 혼란이 야기될 수 밖에 없다.
-나는 분노, 폭력, 공포 등이 모두 유보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만약 분노를 유보한다면, 분노에는 이를 지속적으로 유지시키는 특정한 사고와 가정들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우선 문제는 그런 행동을 억누르지 않고 유보하는 것이 가능하냐이다.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면, 억누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지 말고 억누르는 과정 자체를 관찰한다. 억누르지 않겠다고 자기에게 말할 필요 없이 그저 지켜보는 것이다. 또한 그런 행동을 유보하고 있는 관찰자의 존재가 느껴질 수도 있다.
-'자기수용감각'이라는 말은 전문적인 용어다. '사고의 자기 인식', '사고의 자각' 등으로 표현할 수 있고, 아예 풀어 쓰자면 '사고가 자신의 활동을 인식한다' 정도가 되리라. 사고는 자신의 움직임을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 사고과정에서 사고의 움직임, 생각하는 의도, 생각이 만들어 내는 결과를 인식해야 한다. 사고가 외부에서 특정 결과를 만들어내는 방식도 인식할 수 있다.
-인식으로 인해 물질에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통찰 또는 인식이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개념이 바로 이것이다. 이는 추론적인 이해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생리화학적인 수준, 암묵적인 수준까지, 말하자면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통찰, 즉 사고가 스스로의 행동을 인지하지 못하며, 때문에 사고의 자기 수용감각이 필요하다는 통찰이 중요한 시작이다. 지금 우리는 사고를 정신적인 개념으로만 보게 만드는 조건반사를 관장하는 뇌의 신경접합부를 건드리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7. 참여형 사고와 무한
-관료제 또는 위계질서가 중시되는 현대 조직을 생각해보자. 그런 조직에서 사람들은 대상물로 취급된다. 그들은 정해진 일을 해야 하고, 정해진 방식으로 서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사실형 사고는 사람을 기능으로 인식한다.
-우리는 타인을 대상으로 취급하고, 결국에는 자신까지 하나의 대상물로 취급해야 한다. "나는 여기에 적응해야 해. 이것르 해야 하고, 저것이 되어야 해. 더욱 발전해야 해" 등등의 말을 스스로에게 하면서. 하지만 '사회'는 모든 것을 대상화할 수 있는 객관적인 현실이 아니다. 절대로. 오히려 사회는 모든 사람의 의식을 통해서 만들어진 현실이다.
-궁극적으로 세상 모든 것의 본질이 상호 참여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만물이 만물에 참여하며, 따라서 만물이 곧 만물이다. 그것이 바로 나의 책 <전체성과 감춰진 질서>가 주장하는 내용이다. 이는 만물 안에 만물이 '접혀 들어가' 감춰져 있다고 말하는, 사물이 보는 전혀 다른 방법이다. 그러므로 만물이 근원에는 '접혀 들어간 만물'이 있으며, 우주의 '펼쳐짐'은 접혀 들어갔던 것이 잠시 드러는 것일 뿐이다.
-인간은 세 가지 차원이 있다. 하나는 개인적 차원으로 그저 홀로다. 그리고 인류는 집단적 차원도 있다. 세번째는 바로 우주적 차원이다.
-나는 인간의 경험 대부분이 감춰진 질서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회는 우리에게 거기에는 가치를 두지 말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외부의 질서에 주된 가치를 두라고 배우며,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목적들을 달성하는 데는 그런 태도가 유용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딘가에 여유를 가지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leisure라는 단어는 '비어 있다'는 어원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비어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시간 또는 공간 면에서 비어 있는 공간, 뭉서도 우리는 붙잡고 있지 않은 그런 공간이, 무한으로 가는 발걸음을 자연을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할 수 도있다.
-무한을 보는 순간에 의식이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개인적인 차원과 집단적인 차원의 변화가 함께 일어나는 것이 중요핟. 둘은 함께 가야 한다. 그러므로 이런 전체적인 문제, 말하자면 커뮤니케이션, 대화하는 능력, 커뮤니케이션에 참여하는 능력이 모두 대단히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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