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

아우라 -카를로스 푸엔테스

평화숲 2011. 4. 25. 10:15

[아우라] 카를로스 푸엔테스

읽게 된 동기 : 아우라라는 제목때문에. 아우라에 대해 이해하고 싶었다.

-아우라는 누구인가?

그렇다면 이러한 결합의 매개자인 아우라는 누구인가? 아우라는 실체적 존재가 아니라 '가벼운 바람', 즉 콘수렐로가 만든 환영이자 제식을 행하는 대리인이다. 아우라의 실체적 존재를 부인하는 서술은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아우라가 부엌에서 새끼 양의 목을 쳐서 피를 뿌리는 순간에 콘수엘로가 방에서 같은 동작을 한다든지, 두 인물이 식사할 때 똑같이 움직인다든지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아우라는 콘수엘로의 젊음과 재생의 욕망이 빚어낸 인물이다. 아우라와 콘수엘로는 부분과 전체라는 환유적 관계이다. 아우라는 이름은 성인의 머리 위에서 빛나는 원환이자, 비교적 전통세서 마녀들이 요술을 부리는 유혹이라는 의미를 진다. 소설 속 아우라는 콘수엘로가 만든 강력한 흑마술의 결과이자 욕망의 투영체이다. 또한 아우라는 독일의 평론가인 발터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 작품]이라는 에세이에서 예술 작품이 지니는 범접할 수 없고 일회적인 신비한 분위기라는 의미로 정의한 용어이기도 하다. 그에 의하면 예술작품은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멀리 떨어진 것의 일회성을 드러낸다. 예술의 대상이 되는 자연은 예술가에게 생명이 깃든 신비로운 본질을 전한다. 자연은 스스로 생동하는 범신론적인 신비로움이다. 그런데, '아주 가까이 있다하더라도 어떤 먼 곳'으로 느끼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종교적 기능이다. 숭배의 대상인 신에 가까이 접근해서는 안 되듯 예술 작품도 역시 그렇다. 마치 종교적 숭배의 대상처럼 예술 작품은 '아우라'를 갖는다. 즉 아우라는 "멀리 떨어진 것이 일회적으로 드러남"이라는 의미이다. 발터 벤애민은 산업사회과 되어 예술이 기계를 통해 복제되기 시작하면서 아우라를 상실했다고 본다. 푸엔테스는 이러한 아우라의 의미를 육화시킨다. 파도가 출렁이는 에메랄드 빛 바다로 묘사되는 그녀의 녹색 눈동자에 펠리페는 일회적이면서도 영원한 사랑을 느낀다. 그녀는 단 한 번 눈을 마주친 것으로 펠리페에게 치명적인 매혹을 선사한다. 그녀는 이후 팜 파탈처럼 펠리페의 방문을 열고 나신으로 살며시 그를 유혹한다. 그리고 펠리페는 그녀를 영원히 염원하게 된다.  그녀는 또한 범신론적 숭배의 대상이다. 그녀가 처음 펠리페 앞에 출현하기 이전에 '사가', 즉 "성스러운 현명함을 지닌 자"라는 토끼가 사라지고 묘하게도 콘수엘로는 토끼와 아우라를 동일시한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와 녹색치마는 그녀가 새끼 양의 가족을 벗기는 장면과 더불어 무언가 악마적인 신비함을 내포한다. 또한 콘수엘로의 흑마술적 제의와 성상 옆에 웃고 있는 악마를 통해 아우라가 악마의 신기에 사로잡혔다고 해석할 수 있다. 흔히 기독교적 세계관에서는 이브 이후로, 유혹하는 여성에겐 악마적 속성이 있다고 묘사해 왔다. 새끼 양이나 염소를 희생물로 바치는 제의나 애니미즘은 기독교가 등장하면서 악마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 기독교적 상징이 등장하는 것은 단순한 풍자적 패러디가 아닌 예술혼이 전이되는 성스러운 의식처럼 느껴진다. 그녀가 펠리페에게 자신의 몸을 바친 후 침대에 십자가처럼 누운 모습이다. 아우라는 단순히 콘수엘로의 욕망을 위한 매개체나 주실이 빚어낸 환영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펠리페에게나 콘수엘로에게나 접근 불가능하고 일회적이며 다가갈 수 없는 욕망의 대상이다. 물론 콘수엘로는 과거의 사랑을 현재에서 실현하기 위해 아우라를 탄생시켰다. 단순히 환영이나 젊은 날의 이미지에 대한 영적 복제에 불과한 아우라는 점차 자신의 생명력을 획득해 나간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콘수엘로의 헌신적 노력이 필요하다. 콘수엘로의 광기 어린 주술은 모두 아우라의 생명을 위한 것이다. "그녀는 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있어요."라느 ㄴ아우라의 말은 이런 면에서 의미심장하다. 불가능한 젊음의 재현과 사랑의 재현, 이것은 예술가에게 창작이 그렇듯 콘수엘로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그것이 피어오르는 비눗방울과도 같은 단 한 번의 에피파니에 그친다 하더라도 그 여운, 그 아우라는 영원히 남기에 그녀는 자신을 기꺼이 소진하고 만다. '위안'이라는 뜻의 '콘수엘로'에게 있어 가장 큰 위로와 즐거움은, 바로 일회적이지만 너무도 눈부신 아우라의 재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