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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창조 - 성격적 세계관과 삶의 출발점
1) 세상은 하나님의 경이로운 작품
: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
이 세상의 모든 물건들은 그것을 만든 사람이 있듯이 이 우주만물도 설계하시고 만드신 분이 있습니다.
이 우주가 단지 우연의 산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고 오묘하며 질서정연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은 이 모든 것이 창조주의 디자인이요 작품이라고 선언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창조주와 피조물 간에는 넘을 수 없는 본질적인 경계가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 경계는 바로 피조물에게 적용되는 모든 창조의 법 또는 질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창조주는 피조물을 만드신 분이므로 그 모든 법을 초월하십니다.
: "그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 사람의 얼굴이나 몸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과 인격성이 닮았기에 하나님과 친밀한 사랑의 교제가 가능한 것입니다. 다른 모든 우상들은 결국 피조물을 인간이 인위적으로 절대화한 허상에 불과합니다.
[진화론] 만물의 기원에 대해 우연이라고 말하고, 최초의 물질이 어떻게 존재했는지에 대해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 불가지론입니다. 진화론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을 주지 못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창조는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절대주권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2)창조주의 전능하신 말씀과 신실하신 언약
성경은 그분의 '말씀'으로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이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진화론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진화과정을 자연도태와 적자생존의 법칙으로 설명합니다.환경에 맞지 않는 생물은 자연히 사라지고 적응하는 것들만 살아남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격적인 조물주의 개입이 전혀 있을 수 없습니다. 비인격적이고 우연에 의해 시작된 생명체가 여러 가지 다양한 환경과 상황 속에서 적응하고 살아남은 결과가 현재의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도 앞으로 어떻게 변화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잠정적이고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안정감 대신 불안을 가져다 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하신 말씀과 그분의 신실하신 언약을 신뢰하며,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존재하는 것을 믿습니다. 빛이 있으라고 하시니 빛이 있었고 바다가 있으라고 말씀하시니 일점일획도 헛되이 땅에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이루어지므로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찬양하며 더욱 그분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3) 만드신 만물에도 지혜와 법칙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지혜로 모든 만물을 지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주께서 손수 만드신 것이 어찌 이리도 많습니까? 이 모든 것을 주께서 지혜로 만드셨으니 땅에는 주님이 지으신 것으로 가득합니다. " 시편 104:24
아름답고 놀라운 창조의 세계를 이해하면 할 수록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진화론자들의 입술에는 '찬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진화론자의 가슴에는 우주에 대한 벅찬 감동이 없습니다. 우연은 찬양의 대상이 아니며 현재의 세게는 치열한 적자생존 경쟁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만물이 지혜로운 설계자의 걸작품이 아니라 그냥 우연히 되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거기에서 어떤 감동을 느끼지는 못할 것입니다. 사실상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우연의 산물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것 또한 하나의 믿음일 뿐입니다.
4) 삼위 하나님께서 함게 일하신다.
5) 인간, 영광스런 하나님의 대리자
하나님의 창조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원숭이에서 진화한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에서 하나님을 닮은 존재라고 선포합니다. 원숭이에서 진화된 인간과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 어느 것이 더 존귀할까요? 어느 입장이 인권의 궁극적인 기원과 인간의 존엄성을 더 잘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진정 전혀 차원이 다른 세계관이요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인간이 하나님의 성품을 어느 정도는 닮았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 전지전능하심이나 영원하심 등과 같이 인간이 공유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거룩하심이나 의로우심, 자비하심 등과 같이 인간이 어느 정도 공유할 수 있는 속성도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엡4:24고 권면합니다. 왜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형상대로 창조하셨을까요? 창세기 26~28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땅에 충만하고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면서 땅을 정복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것을 소위 '문화명령'이라고 네덜란드의 개혁주의 신학자인 아브라함 카이퍼는 말합니다. 피조계에 담겨 있는 무한한 가능성들과 잠재성을 개발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드러내어야 할 사명이 우리 인간에게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란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인간이 어떻게 활동하고 응답했는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도 있고 불순종할 수도 있습니다. 순종할 경우 그 문화는 발전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그 문화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 결국 자체적인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인류 역사를 통한 인간의 모든 활동을 문화라고 넓게 정의한다면 인간의 총체적인 문화 활동이 다른 아닌 역사이며, 하나님의 문화명령에 대한 응답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의 본질은 그저 우연히 단세포 생물에서 수 많은 진화를 거쳐 지금까지 진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닮아 온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역사와 문화의 주체로서 이해해야 합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헹크 헤르쯔마 교수는 인간의 존재 자체가 응답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인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응답하는 인간'(Homo Respondent)'라고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 노동하는 존재, 유희하는 존재 등 여러 가지로 정의해 왔지만, 인간의 존재와 그 모든 활동을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볼 때 인간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이 문화명령에 응답하는 존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인간의 세계관과 모든 활동 또한 하나님의 규범적 말씀에 대한 응답입니다. 우리는 응답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 응답에 대해 책임져야 합니다. 책임이라는 하는 단어는 영어로 'Responsibility'입니다. 이 단어는 '응답'을 뜻하는 'Response'와 '능력'을 뜻하는 'ability'라는 두 단어가 합성된 것입니다. 즉 '책임'이란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격체이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삶에 대해 순종 또는 불순종으로 응답할 수 있고 그 응답에 대해 궁극적인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심판'입니다. 하지만 진화론에서는 책임을 묻기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부단히 자신을 변화시켜야만 하므로 자신의 모든 행동에 대해 궁극적인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실상 이러한 세계관이 지배하는 사회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6) 창조는 완성을 지향한다.
만일 우리가 인간의 다양한 응답적 문화 활동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정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동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허락하신 동산을 잘 '개발'하는 동시에 '보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창조된 세계를 인간이 여러 가지 문화 활동을 통해 올바른 방향으로 발전시켜야 함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창조는 완성을 지향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창조란 오픈 시스템이라고 사이어는 지적합니다. 결정적으로 프로그램화된 과정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에 의해 다양하게 펼쳐질 수 있는 여러 가능성들이 잠재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다른 말로 '개현 과정'이라고 표현하기 합니다. 창조 세계는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져 간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사회진화론은 '힘'과 '경쟁'이 사회의 진화를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는 사상으로 역사의 과정을 단지 생존경쟁의 논리로만 이해합니다. 역사의 발전 과정은 단지 급변하는 환경에 대한 인간의 적응 여하에 좌우되는 것이며, 따라서 개인주의적 자본주의가 발달하게 되고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이 가속화됩니다. 그러나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문화와 역사의 발전 방향은 결국 하나님의 문화명령에 대해 인간이 어떻게 응답하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7) 존재 그 자체가 좋다.
동시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더 나아가 모든 피조 세계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어 '매우' 좋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참 좋았다" 창1:31
"하나님의 지은신 모든 것이 선하므로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딤전4:4-5 물론 여기서 '좋다'고 말하는 것은 윤리적이나 도덕적인 선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가 좋음을 뜻합니다. 이러한 성경적 세계관은 모든 종류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배격합니다.
진화론은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단지 생존 경쟁과 환경에 적응한 생물들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여기에 대해 어떠한 가치 평가를 내릴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올 세계가 과연 지금보다 더 나을지에 대해서도 전혀 답을 줄 수 없습니다. 단지 환경변화에 잘 적응하는 생물들만이 생존할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8)초월적인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삶
창조에 관해 우리가 또한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창조주 하나님의 초월적인 주권과 동시에 그분의 내재성인 우리와 함께 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셨기에 그 모든 것을 초월하시는 분이시지만 동시에 겸손히 회개하는 사람과 함께 하셔서 그들을 치유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초월성만 인정하게 되면 이신론이 됩니다. 이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후 태엽이 감긴 시계와 같이 세상은 더 이상 조물주의 간섭 없이도 저절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주의 내재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슬람의 신관도 이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계관은 세상을 하나의 '닫힌 시스템'으로 보게 되며, 따라서 '기적'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기에 내재하시지도 않고, 완전한 인격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도 않으며, 인간사의 주재자도 아닙니다. 따라사 자연에 대해 결정론적 사고를 가지고, 인간은 비록 인격체이지만 우주라는 기계의 한 부품과 같은 단지 우주의 한 구성원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연주의적 세계관은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물질만이 원래부터 존재해 왔으며 영원히 존재할 것이고 그 존재하는 것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초월적 신이라는 것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자연은 이미 존재하는 법칙에 의해 움직이며 인간도 하나의 고도의 복잡한 물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을 둘러싼 육체적이고 정신적 신비는 어느 것을 막론하고 순수한 신비가 아니라, 우리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기계의 복잡성에서 유래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자연주의적 세계관은 창조주의 초월성과 내재성 모두를 배척합니다.
이보다 더 극단적인 세계관은 무신론적 실존주의입니다. 이 세계관은 우주가 단지 물질만으로 구성되었지만 인간에게는 실재가 주관과 객관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인간에게만 그 존재가 본질을 선행하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을 스스로 새롭게 만들어 갈 수 있으며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본성과 운명에 대해 완전히 자유롭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결국 이것은 허무주의와 염세주의로 귀결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내재성만 강조하면 범신론의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은 만물에 신적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 신적 존재의 초월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귀신들을 섬겨야 하므로 미신적 주술 행위를 통해 현세적 축복과 성공만 추구하는 왜곡된 세계관을 낳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분명히 보여줍니다.
9) 약속을 신실히 지키시는 분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과 언약을 맺으셨고 그 약속을 신실히 지키시는 분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존재하며, 따라서 그 신실한 말씀에 의해 자연의 법칙성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회의론에 빠지게 되면 사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매일 걱정과 불안 속에 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알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은 평안을 회복하며 더욱 감사하게 됩니다.
10) 전 우주에 미치는 직접적인 창조의 법칙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그 나름대로의 법칙을 따라 하셨음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우주 만물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거기에는 질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여러 학문이 발전한 이유도 바로 이러한 우주 내의 법칙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헤르만 도여베르트는 이러한 질서와 법칙이야말로 창조주와 피조물을 구분짓는 경계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창조주는 법의 제정자이시므로 그 법을 초월하지만 피조물은 그 법에 종속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창조를 이야기할 때 창조주-법-피조물 이 세가지가 포함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창조의 법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연법입니다. 이는 중력의 법칙, 운동의 법칙, 열역학의 법칙, 광합성의 법칙, 그리고 유전의 법칙 등과 같이 전 우주에 미치는 직접적인 창조의 법칙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자연과학자들의 연구는 사실상 세계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법칙을 다시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진화론은 '열역학 제2법칙'에도 맞지 않습니다. 이 열역학 제2법칙이란 다른 말로 '무질서도 증가의 법칙'이라고 하는데 모든 만물은 시간을 흐를수록 그 질서도가 감소하고 무질서도가 증가한다는 것입니다. 새 자동차도 타지 않고 가만히 두면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면 녹이 슬고 점점 그 성능이 떨어집니다. 반면에 진화론은 우연히, 어떻게 해서 여러 가지 물질들이 이리저리 조합되어 새 자동차가 저절로 생겨났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등동물에서 고등동물로 진화되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며 질서도가 증가하는 과정인데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에 그러한 법칙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진화론을 사실상 허구일 수 밖에 없습니다.
두번째는 규범입니다. 이것은 십계명과 같이 인간의 사회와 문화에 적용되는 당위의 법칙으로, 준수할 수도 있지만 어길 가능성도 있는 도덕법 또는 문화법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책임성이 강조됩니다. 따라서 규범은 오직 인간에게만 주어진 창조의 법인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지혜란 바로 이러한 규범적 법칙을 바로 분별하여 이 법을 따라 사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진화론은 우리에게 아무런 삶의 의미를 주지 못합니다. 원숭이로부터 우연히 진화되었고 또한 앞으로 다른 생물로 바뀔지 모르며, 모든 법칙은 그저 우연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이 속에는 어떠한 윤리도 없고 그저 적자생존, 약육강식이라는 잔인한 정글의 법칙만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될 수 밖에 없고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약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 필요도 없는 무자비한 사회를 낳을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11) 창조, 성격적 세계관과 삶의 출발점
이 우주는 우연히 생겼거나 진화된 것이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에 의하여 설계되었고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나아가 이 우주는 동일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통하여 다스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그분은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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