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때 소명을 자기 인생이 원하든 원치 않든 따라야만 하는 단호한 의지의 행동이자 인생의 방향을 선택하는 엄숙한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어떤 죄의식과 강박증에 사로잡혀 진리와 선의 길을 따른다면 소명에 대한 그런 접근법이 옳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믿고 있는 것처럼 진정한 우리의 자아가 추구하는 것이 완전함이라면, 마음에도 없는 소명을 추구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폭력이다. 아무리 숭고한 비전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내부에서 길어진 것이 아니라 밖에서부터 부여된 강제의 것이라면 그것은 심각한 폭력이다.
우리 안의 참자아는 침범을 당하면 우리에게 저항할 것이다. 진실을 인정할 때까지 때로는 비싼 댓가를 치르게 하면서 우리 인생을 방해할 것이다. 소명은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듣는데서 출발한다. 우리는 인생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그 참모습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 참모습이 내가 원하는 모습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 인생은 내 의도가 아무리 진지하다 할지라도 결코 참된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
이성이나 에고보다 더욱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할 때, 우리 내면의 스승이 진실을 말하고자 할 때 무의식적으로 흘러 나오는 그런 종류의 말을 할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럴 때는 우리의 인생이 해 주는 말ㅇ르 잘 듣고 받아 적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진실을 잊지 않고, 그것을 들은 적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물론 인생은 꼭 언어를 통해서만 말하지는 않는다. 행동과 반응, 직관과 본능, 감정과 몸의 상태를 통해서 어쩌면 말보다도 더욱 심오한 표현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사람에게도 식물처럼 어떤 특정한 경험의 방향으로 스스로를 끌어당기고 도움이 되지 않는 다른 것들을 멀리하려는 지향성이 있다. 만약 우리가 자기 경험에 대한 스스로의 반응을 읽어낼 수만 있다면 (매일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써 내려가는 그 텍스트를), 더욱 진정한 삶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어떻게 자기 인생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연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 문화권에서는 쓸데없이 여러 방면에서 정보를 수집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 문제의 근원이 인간의 영혼일 때는 별 효과가 없는데도 말이다. 영혼은 소환장이나 반대 심문에는 응답하지 않는다. 영혼은 고요하게 그를 받아들이며 신뢰하 ㄹ만한 상황에서만 자신의 진실을 말한다.
영혼은 야생동물과 같아서 거칠고 활달하며 노련하고 자립적이지만, 동시에 매우 수줍음을 탄다. 야생동물을 보려면 숲에 들어갈 때 절대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오라고 불러대선 안된다. 오히려 살금살금 걸어 들어가서 한두 시간 정도 나무 밑에 앉아 조용히 기다려야 한다. 그 때 우리가 기다리던 동물이 모습을 나타내고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야생의 모습을 만날 수 있게 된다.
모든 사람의 내면에 존재하는 참자아, 이것이 바로 진정한 소명의 씨앗이자 우리 자신의 참된 정체성이다. 나는 교회 안에서 성장한 까닭에 '소명'의 의미에 대해 맨 먼저 배웠다. 신 앞에서 겸허하고 세상의 다양성을 존중하며 정의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종교적 전통에서 자란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환경에서 내가 깨달은 '소명'의 개념은 왜곡된 것이었다. 소명이란 자신을 향해 외부에서부터 들려오는 도덕적인 요구의 목소리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 뭔가 지금의 자기 모습보다 더 훌륭하고 자신을 초월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상을 그리고 있었다.
소명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자신에 대한 깊은 불신에서 시작된다. 죄 많은 자아는 '선'이라는 외부의 강제적 힘을 동원해 바로잡지 않는 한 늘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그런 생각 때문에 나는 늘 내 인생을 잘 꾸려 나가기에는 부족한 존재라는 느낌을 가졌다. 내게 기대되는 이상적인 모습과 실제 모습 사이의 차이 때문에 죄의식을 만들어 내면서 그 격차를 좁히기 위해 몸부림치느라 지쳐갔다.
오늘날 내가 이해하는 소명의 의미는 상당히 다르다. 소명이란 성취해야 할 어떤 목표가 아니라 주어지는 선물이다. 소명의 발견이란 얻기 힘든 상을 바라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가지고 있는 참자아의 보물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소명은 나 아닌 다른 어떤 존재가 되라고 '저쪽 바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소명은 본래 타고난 그 사람이 되어 태어날 때 신이 주신 본연의 자아를 완성하라는 '여기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서 나온다.
그것은 기묘한 선물이자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던 때의 바로 그 모습인 자아라는 선물이다.
이것을 선뜻 받아들이기란 다른 사람으로 변신을 꾀하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
사람은 누구나 천부의 재능을 타고 이 땅에 태어난다. 그래놓고는 인생의 절반을 그 재능을 내버리거나 다른 사람들의 말에 미혹되어 잊어버리고 산다. 젊은 시절 우리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과는 별 상관없는 기대들에 둘러 싸인다. 우리의 자아를 알아 주기보다는 어떤 틀 안에 끼워 맞추려는 사람들의 기대 말이다.
가정, 학교, 직장, 종교 단체에서 우리는 참아자를 버리고 사회적인 기준에 맞추어 살아가도록 교육받는다.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와 같은 사회적 압력에 짓눌려 자기 본래의 형상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망가질 때도 있다. 또한 우리 자신 역시 두려움에 내몰린 나머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참자아를 배반하는 일이 너무나 많다.
소명에 대한 가자아 깊은 질문은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가 아니다. 더욱 본질적이며 어려운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 내가 타고난 본성은 무엇인가?'이다. 세상 만물은 나름의 본성이 있다. 누구에게나 능력은 물론 한계도 있다.....
인간의 장가 지닌 본성 역시 능력과 한계를 함께 지니고 있다. 자기가 가진 재료에 대한 이해 없이 소명을 구한다면 그 인생은 아름답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기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의 생명까지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우리의 가장 깊은 소명은 그것이 우리가 '되고자 하는' 어떤 이미지에 맞든 안 맞든 자기의 진정한 자아를 향해 성장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기쁨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진정 우리가 갈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진정한 소명은 자아(self)와 봉사(service)를 하나로 결합한다. 프레더릭 뷰크너는 소명을 '마음 깊은 곳에서의 기쁨과 세상의 절실한 요구가 만나는 지점'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뷰크너의 정의는 소명이란 자아에서 시작하여 세상의 요구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현명하게도 소명의 시작 지점을 제대로 본 것이다. 소명의 시작은 세상이 원하는 바가 아니라 인간 자아의 본성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그것은 바로 자아에게 신이 창조한 선물로 이 땅에 태어났음을 깨닫는 크나큰 기쁨을 안겨 주는 것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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