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숙영의 회복적생활교육 이야기

기독교 영성에서 바라본 회복적 생활교육 - 박성용

평화숲 2017. 6. 6. 14:31

기독교 영성에서 바라본
회복적 생활교육
                                               

박성용 


기독교사가 회복적생활교육에 다가갈 때 장애물들


일반 교회에서 신앙훈련을 받은 기독교사가 학교현장에서 회복적생활교육(Restorative Disciplines)이라는 목표점에 도달하는 길에는 몇 가지 장애가 있다. 이 장애는 심각할 정도로 보편화되어 있어서 이에 대한 자각을 하지 않으면 왠만한 기독교사가 자신의 원래의 성서적 전통인 회복적 훈육에 관하여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 또한 겉으로 회복적 생활교육을 지도하는 기독교사가 이 장애에 대한 내면적 고정 신념을 확인하고 제거하지 않는 한 가르침과 생활지도에서 회복적 훈육의 방식으로 가르침이 깊어지고 에너지를 공급받는 데 상당한 걸림돌로 작용하게 된다. 


첫째는 신앙과 가르침과의 이원성이다. 교회의 신앙생활과 학교에서 가르침에는 아무런 일관성이 없는 서로 다른 영역으로 분리해 처신하는 것이다. 세속적 가르침은 가르침대로 그리고 교회에서 신앙은 신앙대로 서로 다른 가치영역의 질서를 갖고 있다.


이는 에수공생애 당시에 사두개이파나 헤롯당파 사람들에게 일어났던 문제이다. 신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특정한 시기와 공간(곧 안식일과 회당)이 있고, 일상의 생활(비지니스와 정치의 시간과 공간)이 따로 있어 세상에서 도덕적 부담을 최소화하여 세상삶에 전념하게 만든다. 우리의 삶에도 신앙생활과 교사로서 세속교육은 서로 진리가 충돌하기 때문에 상호간의 분리적용을 통해 교회와 학교교실환경에서 적용하는 원리는 다르다고 본다. 여기서 필자의 중요한 포인트는 신앙을 학교에서도 가르치라는 말이 아니다. 신앙의 진리와 가르침의 진리간에 만남이 없다는 근본신념에 대한 이해에 관한 것이다.       


둘째는 신앙의 율법성이다. 신에 대한 헌신은 엄격한 계율과 도덕적 당위의 준수를 요구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두려운 하나님은 그분의 계율을 어기는 사람에게는 징벌과 심판을 내리신다는 관점이다. 여기에는 옳고 그름의 판단, 해야만 하는 도덕적 규율에 대한 준수가 신앙의 중심 에너지로 작동한다.


이러한 성향의 기독교사가 학교현장에서 학생들을 다룰 때, 학칙과 도덕적 당위의 입장에서 잘못, 안하는 것, 못하는 것에 대해 매우 민감한 에너지를 갖고 집중하여 다루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원칙과 정의, 비난과 질책, 그리고 교정과 설득의 방식을 통해 학생에게 다가간다. 이 교사는 잘못된 것에 대해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는 경향성을 갖고 있으며, 자신이 잘못하거나 못하고 있는 것에도 불안과 죄책감 그리고 자신없어함에 대한 빈도수가 커진다.
  
셋째는 기독교 진리의 불꽃이 꺼진 문화적 기독교인이 갖는 합리적 이성주의이다. 여기서는 원인과 결과에 대한 자연적 인과성과 법칙에 대한 이해가 중요해진다. 주관성에 대해 의심을 하며 객관성과 합리성의 명료함의 추구가 중요해진다. 신앙은 신화적 세계의 유물이어서 현대과학의 조명아래 재해석되어야 한다.  


진보적이고 과학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는 기독 교사는 신앙의 불합리성, 모순, 역설에 대해 폐기할 유산으로 보고 신앙의 진리는 지성과 이성에 근거한 소통능력으로 치환한다. 매우 실용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학생들과의 만남에서 신앙적인 부담을 갖지 않는다. 여기서는 정보가 중요하고 사실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원인과 결과에 대한 분석과 합리적인 이해가 가르침의 핵심이다. 이해와 지성은 객관적 세계의 중심성속에서 정보의 명확함에 있다. 그러나 영혼안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 사실을 넘는 영혼의 진실이 무엇인지 신비와 역설, 삶의 존중에 있어 그 기반이 되는 신성한 것에 대한 감각은 놓치고 있다.


지금까지 위의 설명을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이 표시할 수 있다:


사본 -noname01.jpg



기독 교육자에게 이 3 가지 멘탈 모드(mental mode)는 세상을 이해하는 프레임으로 언제나 작동하고 있어서 신앙과 가르침을 굴절시킨다. 학습자의 내면성과 세상간에 만나지는 면이 없거나 혹은 한쪽에 흡수되어 신앙과 가르침이 단절되거나 편향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인식방식 대신에 대안이 되는 것은 신앙의 빛이 세상의 진리의 잠재성을 밝혀주고, 또한 세상의 빛이 신앙의 잠재성을 밝혀주는 열려있는 상호관계성이다. 이것은 바로 뫼비우스)형태의 멘탈모드이다. 이는 신앙의 진리와 세상의 리얼리티간의 상호풍성함과 기여를 강화한다. 전자의 세 인식 모드는 대화가 없는 격리(A), 정복적인 통제(B), 차거운 인과론(C)에 빠지게 된다면, 뫼비우스형 상호관계성의 모드는 파커 파머가 말했듯이 “질서와 열정을 갖는 영원한 대화”를 통해 진실을 배우고 성장하도록 돕는다.  여기서는 그 핵심이 신앙과 가르침, 의식과 실재, 그리고 개인과 전체가 상호의존하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리얼리티도 그러한 통전적인 방식에서 드러난다는 인식이다. 



리얼리티를 향한 영성과 가르침/배움


존재의 핵심, 우리의 삶 그리고 우주만물은 공동체적이고 상호관계적이다. 현대물리학자들은 홀로그램적이라고도 한다. 한 개체는 전체를 언제나 품고 있다는 것이다. 영성과 가르침(혹은 배움)의 핵심은 실재(리얼리티)에 대한 것이다. 그 실재는 다음과 같이 상호관계와 상호의존의 그물망으로 구성된다.


첫째, 양자물리학에서 다루듯이 인식자, 인식된 대상, 그리고 인식도구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의식과 실재는 서로 얽혀있다. 모든 것은 관계들로 나아가는 무리들이고 개별자는 관계의 패턴이 갖는 결과들이다.


여기서 교육자로서 이해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인식론이나 페다고지는 연결과 관계속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식자, 인식대상 그리고 인식행위나 인식도구는 서로와 얽혀있고 서로를 제한하거나 확장시킨다. A라는 대상·사건·상황은 그냥 우리의 뇌에 인식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인식자의 신경회로망에서 패턴화된 것(혹은 프레임된 것)에 의한 상호대응으로 이루어진‘해석된 A’이다. 언제나 인식자의 태도와 가치 그리고 인식방식이 인식대상에 영향을 미친다.   


둘째, 생태학과 신경심리학에서 보면 안전과 건강은 외부 침입자에 대한 정복이나 차단이 아닌 주변과의 열린, 적극적인 소통을 통해 이루어진다. 움직이고 에너지가 넘치는 것이 점점 에너지를 소비하고 경직되어 중단되는 엔트로피의 법칙이 자연에 적용되지 않은 것은 바로 이 열린 개방 시스템이 끊임없이 활력과 에너지를 창조하고 변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통을 통해 안전, 건강 그리고 성장이 일어난다.


교육자로서 이해해야 하는 점은 관계와 연결의 공간이 안전, 건강, 성장에 핵심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어째서 가르침이 일어날 때 정보의 내용(커리큘럼)이 아닌 과정(교사와 학습자간의 신뢰와 연결)이 중요한지를 다중지성에서 강조하는지 그 이유인 것이다. 관계와 연결은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건강한 긍정적인 분위기를 창출하며, 그러한 비난없고 두려움 없는 공간에서 성장과 배움이 일어나게 한다. 스트레스는 바로 이러한 관계와 연결이 잘려질 때 일어나는 정보의 소음과 비자발적인 상황에서 압력으로서 느끼는 반응이다.


셋째, 우주의 작은 축소판으로서 교실환경을 생각해 볼 때도 페다고지는 나(교육자), 너(학생) 그리고 학습주제(커리큘럼 혹은 생활지도상황)의 상호소통속에서 일어난다. 나의 정체성, 너/너희들의 타자성 그리고 주제의 진리성은 동시발생적이며 언제나 이 세 요소들 각각에 영향을-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미친다.


교육행위는 언제나 세 가지 연결의 동시방생적인 균형에서 일어날 때 최적화된 상태가 된다. 교육자가 무언가를 가르칠 때 그냥 그것은 수업교안의 내용이 정보로 교사로부터 학습자에게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수업주제와 관련된 교사의 내적 정체성과 성실성(의미, 가치,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한 신념)이 표현되고 학습자의 타자성이 갖는 내적 정체성과 성실성이 주는 차이와 다양성이 질서와 열정이라는 순환적인 대화 구조속에서 계속적인 만남을 펼치며 나가는 하모니인 것이다. 교사의 정체성만 중요할 때 권위적이 되고, 학습자의 타자성만 존중할 때 방임이 된다. 그리고 교사와 학습자의 내면성을 건드리지 않는 주제의 정보전달은 지루하고 영혼을 억압한다.
 
교사로서 이 리얼리티의 세 차원, 곧 존재는 상호관계적(혹은 홀로그램적)이며, 안전/건강/성장도 상호관계성에 기반하며, 가르침도 상호관계적 특성이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 가르침의 방향이 보인다.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그리고 가르치는 자로서 교사의 정체성과 가르침에 대한 근본적인 터전이 바로 상호관계성 혹은 온전성(wholeness)이라는 리얼리티 문제로 귀결된다는 통찰을 갖지 않고는 배움과 생활지도에 있어서 적절성과 일관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리얼리티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신앙과 가르침 곧 지성의 상호 연결과 상호지원이 일어난다. 본래 종교(religion)이란 ‘다시(re-)’와 ‘잇다, 모으다(ligere)’이며 지성(intelligence)도 ‘사이(inter)’와 ‘잇다, 모으다(ligere)’로서 종교는 다시 잇거나 모으고 지성은 서로 잇는 것을 통해 출현되는 생생한 깨달음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파커 파머가 그의 책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과 「가르칠 수 있는 용기」에서 언급하였듯이, 영성은 ‘연결을 강화하는 능력’이며 가르침도 연결능력을 강화하는 것이자 진리가 서로 소통되는 공간을 주는 것이라는 말에 동의를 한다.


다시 정리하자면 신앙 곧 영성과 가르침은 리얼리티를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대한 문제이며, 기독교 교사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회복적 생활교육을 하는 경우 학교현장의 두 초점인 수업과 생활지도가 어떻게 연결을 강화할지에 대한 문제로 귀결된다. 수업에 있어서는 교사로서 나의 정체성, 학생들의 타자성 그리고 학습주제의 진리성간의 상호소통과 연결이 중요하고, 생활지도에 있어서 혼란, 폭력과 갈등상황에서 갈등당사자들인 A와 B, 혹은 A그룹과 B그룹 그리고 자극주제간의 상호소통과 연결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그럴 때 회복적(혹은 건설적)으로 훈육한다는 것은 연결을 통해 온전함(wholeness)에로의 다가감 혹은 갈등전환을 통해 더 큰 공동체성에 대한 다가감으로 이해 될 수 있다.



기독교 영성의 두 원류


회복적 생활교육은 원래 회복적 정의(혹은 성서적 정의, 공동체적 정의, 관계적 정의라고도 기독교에서는 부른다)의 교육적 접근방식이다. 그리고 이 교육운동은 기독교 영성의 본원적인 흐름을 이 세상 삶의 가장 거친 영역인 차이(difference), 갈등(conflict) 그리고 손상(damage)의 영역에로 활동적 차원에서 적용할 때 새롭게 형성된 개념적인 재-프레임화한 교육운동이다. 


기독교 영성 곧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창조(creation)신앙과 구속(redemption)신앙을 통해 이루어져 있다. 지금의 제도권 교단은 대게 중세신학에 대한 마틴루터의 프로테스트(그래서 프로테스탄트 즉 저항자로서 개신교란 말이 파생했다)를 통한 구속신앙의 변증법적 영향의 주 흐름 속에 있다. 필자가 말하는 것은 중세신학이후가 아닌 그리스도교 초기 즉 로마제국에 대항한 예수 그리스도 공동체의 구속신앙을 이야기한다. 이것을 이야기하기 전에 그동안 잊혀진 창조신앙(이것은 기독교사에 더 오래된 전통이다)의 간단한 이야기를 먼저 하고자 한다. (이것이 잊혀졌지만 더 오래된 신앙이면서 그동안 잊혀진 것은 바로 기독교가 지하교회에서 로마의 제국종교, 중세의 교권종교 그리고 국가종교로 이어지면서 지배체제를 강화하는 데 창조신앙보다 구속신앙의 같은 패턴을 이용하는 것이 민중지배에 더 효과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주 간단한 예는 노예제도가 기독교 역사에서 1500년 이상을 지속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창세기 1장에서 보듯이 신은 ‘존재하라’는 말씀을 통해 빛과 어둠, 그리고 삼라만상을 존재하게 하시고 그들의 존재에 대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미쁘심의 감동을 드러내신다. 그리고 이 각 존재들의 존재성, 충만성, 다양성, 상호성이 가능하게 되는 안식일(시간)과 에덴(공간)이 창조의 목적과 의미가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혼돈과 무질서에 대한 것이다. ‘모양이 갖추어지지 않고 아무 것도 생기지 않은(창1:2)’ 혼돈과 무질서에 있어서 가장 근원적인 복음(‘기쁜 소식’)은 이렇게 시작된다.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 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2) “빛이 생겨라”(3). “물 한가운데 창공(firmament)이 생겨 물과 물 사이가 갈라져라!”(6절)


지금까지 주석가들이 별로 신경쓰지 않은 이 세 구절은 사실상 유대-기독교전통의 핵심적인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 필자는 이것을 복음의 소박한 원형이라 부른다. 혼돈(아직 모양이 갖추어지지 않음)과 어둠 그리고 두려움의 ‘깊은 물’(고대세계관에서 물은 두려움 그자체이다) 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다는 것, 빛이 거기서 나온다는 것 그리고 그 깊은 물을 창공/궁창(firmament) 곧 확고함(firmness)으로 형성하신다는 것은 회복적실천의 기독신앙인들에게는 핵심적인 진리를 제공한다. 어둠과 혼돈에는 신의 기운이 휘돌며 감싸고 있으며, 인식의 빛이 거기서 나오며, 안전함(security=firmness)이 우리의 깊은 물과 같은 문제상황속에서 형성된다는 존재론적 토대를 우리는 이 창조신앙에서 얻는다.


구속(redemption)신앙은 요한복음 1장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는 신적 존재력인 말씀(logos, essence) 곧 생명을 주는 빛이 세상(existence)속으로 들어와 활동하심에 대한 증언이다. 그 증언의 핵심은 ‘진리’와 ‘은총’이 눈에 보인 바 되고 그것도 ‘충만’한 실재(리얼리티)로서 보았다는 성육신(혹은 신적 존재력의 내역사화)을 말한다. 조금 더 살펴보겠지만 이것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보게 된 이유이고 그를 통해 예표(豫表)된 성육신은 그를 따르는 자에게도 ‘누려질’ 보편적 성육신의 경험으로 약속되어진다. 그것이 보혜사 성령(‘진리의 성령이 너희와 함께 사시고 너희 안에 계실 것이다’-14:17)께서 하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셨듯이 신적 존재력의 성육화 혹은 내역사화는 자신의 의식과 정체성, 말과 행동에 있어 근본적인 변혁(trans-form)을 가져온다. 이 변혁은 온전함(wholeness)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이른바 박탈된 인생(the de-formed)들에 대해 진리와 은총이라는 새로운 충만성으로 재형성된 인생들(the re-formed)로 바뀌게 된다. 가나의 혼인잔치속에서의 기쁨(2장), 사마리아여인의 영적굶주림의 갱생(4장), 베세다 못가 환자의 치유(5장) 굶주린 오천명의 배불리 먹음(6장) 등은 이러한 구속적 과정, 즉 박탈된 인생들(the de-formed)이 온전함에로의 변형된 인생(the re-formed)으로서 은총의 충만한 펼쳐짐에 대한 변혁시킴(trans-forming)의 증거들이다. 그리고 진리는 니고데모와의 대화(3) 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나를 보내신 아버지가 나를 증언한다;5장), 그리고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나는...이다 I-Am”의 진술문(세상의 빛, 하늘의 빵, 문, 길과 진리와 생명, 목자, 나는 참포도나무 너희는 가지, 부활이요 생명)들이 바로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온전함으로부터 박탈된 인생조건들 굶주림(영적·신체적), 질병, 무지와 오해, 불신과 증오, 거부와 불신앙의 현실은 심판이 아닌 진리와 은총을 이해하고 그것을 접하는 계기(opportunity)로서 전환된다. 그것의 한 예증이 바로 간음한 여인에 대한 용서(8장)와 본래 소경인자의 치유(9장)이다. 여기서 ‘자기 탓도 부모 탓도 아니라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9:3) 것으로, 즉 원치 않는 사건, 사람, 상황을 하느님의 일을 하는 ‘구속적’ 행위(다른 관점에서는 ‘회복적’ 행위라고도 한다)의 계기로 삼는다.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벗어난 창세기의 가인의 살인부터 계시록의 아마겟돈 전쟁의 폭력적 상황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선한 청지기인 제 2의 아담(사도바울의 표현)이자 하느님의 어린양(요한계시록기자의 표현)은 구속신앙의 예표로서 그리스도의 행위를 통해 하느님께서 원래 창조하시 형상(the formed)에서 탈선한 것들(the de-formed)로 하여금 그분의 변혁적 능력(the trans-forming power)인 진리와 은총을 통해서 원래의 창조의도대로의 목적에로 귀환시키는 거대한 하느님의 섭리를 구속신앙은 펼쳐보인다.    
   
그러한 진리와 은총의 리얼리티(‘눈으로 봄’)가 가능한 것은 신적 존재력에 대한 예수의 의식과 행위의 연결성에 있었다. 곧 자신의 정체성을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자 “나를 보내신 분”에게 돌아간다는 것, 그리고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내 양식”(4:34)이자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10:10)라는 생의 목적에 대한 자각, ‘수건과 대야’ 및 무릎 꿇어 발을 닦아줌에서 보이는 섬김과 새로운 계명으로서 사랑, 그리고 자유케 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보혜사 성령에 대한 자기-위탁과 안내받음에로의 자기-개방성이 자기 정체성과 행위속에 있기에 그러한 진리와 은총의 현존과 출현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렇게 창조신앙이 갖고 있는 존재에 대한 긍정과 보기에 좋았던 존재의 차이와 다양성 그리고 그러한 어울림으로서 안식(풍성한 어울림의 안전한 시간과 공간)이 창조의 면류관(인간이 창조의 면류관이 아니라 안식이 면류관이다)이며, 구속신앙이 보여주듯 박탈된 개별 인간들의 온전한 샬롬에로의 초대와 이를 향한 기여로서 신적 존재력의 활동이라는 이 두 관점은 심판과 징벌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신앙에로의 투사 이면에 면면히 살아 흐르는 기독교 심장의 피와 힘줄이기도 하다.


구속신앙은 나중에는 골로새 서신에서 보듯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인생만이 아니라 만물에게까지 확대(“만물은 그분을 통해 창조”되고 “하늘과 땅의 만물을 당신과 화해”-1;15-20)된다. 바울은 창조신앙과 구속신앙의 핵심을 ‘불러냄’ ‘올바른 관계형성’ 그리고 ‘영광되게 하심’이란 3단계로 요약한다(롬8:30 참조). 여기서 구속신앙은 다시 창조신앙으로 통합되어진다. ‘보시기에 심히 좋고’ 만물의 차이와 다양성이 그대로 서로에게 풍요와 선물로 주는 안식일의 거룩한 시간과 공간에로 나아간다.       



기독교 영성이 회복적생활교육에 주는 통찰


수업과 생활지도에 있어서, 아니 가르침과 배움의 핵심에 있어서 응보형 훈육은 단순히 윤리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연결됨의 상실이라는 존재론적인 자기 정체성의 몰이해와 자비와 은총이 실현되지 못하는 무능력이라는 인식론적인 문제이자 지성의 문제이다. 기독신앙인이자 회복적생활교육자로서 우리는 기독교의 영적 심장과 나의 영혼의 심장간의 단절에 대해 다시금 서서히 깨달아가고 있다.


회복적 생활교육의 핵심 가치들인 존중(respect), 관계(relationship), 책임(responsibility) 그리고 공동체의 회복(restoration)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향하여 손상(damage)과 범죄(crime)의 영역에서 구속신앙이 재-개념화된 것으로 단순히 가치로만 받아들이면 그 원래의 생명력을 공급받거나 변화시키는 힘에 있어 그 효용성을 쉽게 잃게 된다. 그렇게 되면 엔트로피의 법칙이 작동되어 쉽게 에너지가 소진되고 결국은 가르침의 ‘what’과 ‘how’만 아니라 교사의 정체성(‘who’)도 흔들려 결국은 창조와 자유를 향한 구속적 행위가 아닌 반복과 반응만을 하게 된다. 


파커 파머가 신앙과 가르침/배움의 핵심이 ‘연결의 능력과 그 확대’라는 공통터전에서 만난다는 통찰은 회복적생활 교육자에게는 중요한 표지이다. 창조신앙과 구속신앙이 주는 각 개별존재의 불러냄, 차이와 다양성의 올바른 관계의 형성 그리고 좌절, 상실, 아픔, 파괴가 아닌 영광을 결과로 가져오는 것에로 기여와 선택은 똑같이 회복적생활교육자에게 같은 원리로 작용한다. 서클의 수업과 갈등에 대한 회복적 서클의 예가 보여주듯이 환대하기, 연결하기, 탐구하기(수업주제나 갈등과 폭력을 함께 탐구하여 차이와 다양성을 잇기), 나아가기(새로운 미래에로 향해 승승 혹은 영광됨을 향해 선택하기), 축하와 감사하기 등은 같은 과정적 맥락을 갖는 것이다.

우리는 어둠, 혼돈, 두려움을 비난이나 배제가 아닌 ‘생명을 주고 더욱 풍성케함’과 ‘영광됨’을 위한 창조하기와 섬기기로 불러냄을 받았고, ‘보시기에 좋은’ 사역을 위한 공동창조자로, 선한 청지기(good carer)로 있는 것이다. 결국은 회복적생활교육은 타자(학생)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의 정체성과 나를 보내신 분과의 올바른 관계에 대한 회복이 핵심 이슈가 된다.  
 


회복적 서클의 영성적 측면


회복적 실천에 있어서 특히 손상과 범죄문제와 관련하여 지난 70년대부터 선도적인 역할을 한 모델은 피해자가해자화해프로그램(VORP;Victim-Offender Reconciliation Program)이고, 90년대에 새롭게 브라질에서 일어난 프로그램은 회복적 서클(Restorative Circles)이다. 전자는 조정(mediation)진행형태이고 후자는 서클진행형태이다. 이 두 모델이 기존의 정의와 공평성 문제에 변혁적인 패러다임을 주는 기반은 성인들이 술취한 광란의 청소년(VORP)의 행동변화로부터 그리고 후자는 빈민가의 마약갱단의 폭력적인 청소년들의 행동변화로부터 새로운 통찰을 얻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회복적 서클 진행자로서 회복적 서클(도미니크 바터의 모델을 말함)이 단순히 차이, 갈등, 그리고 손상에 대한 윤리적 실천으로서 회복적 실천의 패러다임 전환만이 아니라 실상 회복적 서클은 영성의 실재적인(realistic) 측면을 이 세상에서 현실화하는 데 깊은 연관성과 인식론적 일관성(coherence)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도미니크 바터가 자신의 모델은 매뉴얼에 있는 것이 아니라 ‘회복적 서클은 공동체의 자기돌봄 프로세스’라는 규정을 통해 이일관성이 밝혀진다.


첫째, 존재와 행위의 터전으로서 공동체에 대한 자각이다. 나는 공동체라는 원의 한 일부이며, 존재의 근거는 원래 공동체적이어서 나는 지원받고 있고 풍성한 자원이 이미 주어져 있다. 그러한 공동체성은 나의 정체성과 실재를 구성하는 근원적 토대를 이루며 이는 또한 차이, 갈등, 손상이라는 문제상황을 다루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각자(가해자, 피해자, 영향받은 이들 등)는 혼자나 결핍, 희소성, 지성의 부재가 아닌 이미 충분한 자원과 지혜를 갖고 있다. 이는 이미 “우리 모습을 닳은 사람을 만들자!(창1:26)에서 이미 신성의 본성이 주는 ‘우리’라는 신적인 공동체성에서 발원되어진다. 이 세상과 모든 존재 그리고 각 개인은 고립무원의 섬이 아니라 이미 신적으로 그리고 존재론적으로 공동체로 존재하고 있고, 그 공동체로 초대받고 있으며, 이는 일을 다룰 때 이미 공동체가 자원으로 지원하고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행자인 나는 나 혼자 여기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다. 서클에 모인 사람들은 공동체의 숲을 이루고 있으며 그들은 외형이 가해자, 피해자, 방관자, 주목하는자 등등으로 구별되어 보이지만 공동체로서 모여서 자원(resource)이 안전한 공간(space)이 되어,  숲처럼 탐구 주제가 영혼의 몸을 입고 동물처럼 어슬렁 거리며 자기 목을 축일 수 있도록 돕는다. 충분한 자원이 있고 그것을 확보해주는 공간으로서 공동체가 나에게 주어져 있다. 각자는 비난하든, 지지하든, 따지든, 설득하든 그것 모두가 풍성한 자원이 된다.


둘째로 목표로서 자기돌봄이라는 인식이다. 삶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특히 문제상황, 도전, 위기, 손상, 갈등, 파괴라는 자극 상황들의 발생은 그 목적이 누구를 비난하고 그 발생한 일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쉽게 이해되지는 않겠지만 해결하여 처리해버리기 위한 그 자체가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의 동시발생적인 필요에 대한 자기-돌봄을 배우게하기 위한 것이다. 그 어떤 문제는 돌봄의 필요성을 요청하는 것이지 위험한 존재나 일을 방지하거나 처리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상황의 발생은 개인과 공동체가 무엇을 간과해왔는지에 대한 인식론적 무지의 패턴이 쌓인 것에 대한 증상이며 징조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상처, 손상, 갈등, 파괴를 통해 무엇을 다시금 새롭게 주목해야 할지, 어떤 돌봄이 필요한지를 성찰하게 하는 반면교사가 된다. 그동안 지배체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원칙과 법은 이러한 시야를 막는다. 탈지배체제로서 샬롬은 돌봄(care)이 개인의 덕성과 조직과 시스템의 실천원리로서 살아있기를 요청한다. 그리스도가 ‘나는 선한 목자’, ‘나는 양의 문’,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는 설교를 통해, 치유를 통해, 그리고 죄지은 자들과의 만찬(feast)를 통해 이루고자 하신 근본 사역이 바로 신의 이러한 돌봄으로서 구세적 의지와 관련이 있다. ‘간음한 여인’에게 법과 원칙안에서 잘못에 대한 비난보다 온전한 삶에로의 변화에 대한 돌봄이 문제상황을 보는 데 중요함을 말해준다.


셋째로, 치유와 회복의 작동원리이자 방법으로서 과정을 설정하기이다.  누가 얼마나 잘못했는지 딱지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삶에로 치유와 회복이 되는 과정을 구축하는 것이다. 회복적 서클은 거칠고 힘든 것(input)을 통해서 아름답고 선한 것(output)으로 나온다. 그러한 입력과 산출물 사이에는 과정(process)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잘못에 대한 고정언어나 딱지언어 대신에 과정언어를 만들어 -공감과 열린 질문을 통해- ‘풍성한 삶’ 혹은 ‘원하는 미래’로의 변형을 이루어낸다. 과정은 변형, 변화를 가져오게 하며 이 과정 속에서 지성이, 혹은 공동지성(co-intelligence) 발현된다.


프로세스를 통해 진심이 이어지고 그 속에서 신성한 빛이 출현하면서 지성이 작동되어 명료해지면서, 궁지와 모순, 결핍과 상처는 풍요로움으로 전환되어 모두가 만족한 삶의 결과를 보게 된다. 이것이 프로세스의 힘이다. 한 예로 어둠과 들판에서 아무것도 없는 오천명의 굶주린 군중들에게 예수는 이러한 영적 프로세스를 펼치셨다. 도전적인 상황(오천명이 굶주림)에서 누구를 비난하지 않고 원하는 목적에 초점을 두고, 군중을 질서있게 앉히고, 그나마 있는 것(오병이어)에 대해 하늘에 감사의 축사를 하고, 제자들에게-리더십을 세우기- 골고루 나눠주도록 하여 그 결과가 풍성한 삶(열두 광주리)으로 변하게 하였다. 프로세스는 이렇게 거칠고 힘든 것을 아름답고 선한 것으로 나오게 한다. 갈등과 폭력에서 피해자를 두둔하고 가해자에게 그름을 따지는 딱지언어에서 약자에게 최종 승리자의 면류관을 안기는 방식이 아니라 당사자들이 프로세스라는 과정언어를 통해 모두가 만족한 승승의 방식을 통해 두려움과 수치심 그리고 불안이 아닌 은총이 우리를 지배하며 은총의 프로세스를 통해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이 되는 과정을 펼치고 이 속에 우리를 인도하시는 이가 바로 보혜사 성령께서 하는 일이다.


지금까지 필자는 ‘공동체의 자기-돌봄 프로세스’가 단순히 윤리적인 실천으로서 회복적 서클의 작동원리만이 아니라 실상 성삼위일체의 본성과 맞닿아진다는 진술을 해왔다. 즉, 나는, 각 개인은, 모두는 이미 공동체로서 ‘존재하라’ ‘생육하고 번성하라’하신 창조주의 선언에 따라 풍성하게 자원으로 각자에게 주어지고 이미 그러한 존재론적 터전인 공동체성으로 인해 우리는 풍성한 자원에서 본디 연결되어 있고, 지원받고 있고 있는 존재가 된다. 이는 창조주 성부 하느님의 본성과 일치되어 있다. 


죄, 잘못, 상처, 분리, 고통, 손상, 파괴, 어둠의 그 모든 생명이 지닌 실존적 상황은 악에 대한 영원한 저주나 처벌이 - 이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전통적인 기독교인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만일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은총의 신이 아니라 두려움이라는 신을 믿고 있는 것이다- 아니다. 오히려, 신의 구세적 의지 곧 하느님 형상을 잃은자(the de-formed)를 위한 돌봄-“내가 온 것은 가진 자가 아니라 잃은 자를 위한 것이다”- 을 통해 창조질서가 목적한 최종의 안식경험을 목표로 한 변화된 자(the re-formed), ‘신의 거룩한 성전’으로 되는 돌봄이 신의 의지이다. 이것이 집나간 탕자의 비유의 핵심-아버지의 돌봄하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역할은 바로 이러한 신적인 돌봄을 인간세상에서 실천하는 보편적 성육신(incarnation of care)을 예표한다. 예수는 ‘아버지의 일을 내가 하는 것’에서 그러한 자신의 정체성을 공유하였다. 다시 말하거니와 돌봄은 바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과 이어진다.


회복적 프로세스는 자연에서 씨가 꽃, 향기, 그리고 열매로 맺도록 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예표된다. 그리고 세상에서는 손상을 책임이행을 통한 개인의 성장과 공동체의 복원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신앙에서는 비참함을 영광됨으로 하는 과정에서 보여진다. 이러한 과정을 지치지 않고 탈선된 자를 포기하지 않게 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다. 사도바울은 그러한 성령의 프로세스를 이렇게 표현했다.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에 몰아 넣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롬8:15) 그리고 이어서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불러 주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롬8:30).


이러한 건설적, 회복적 혹은 발전적 과정을 통해 노예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비참에서 영광으로 변혁적인 프로세스를 일으켜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고 “서로 연결되고 점점 커져서 주님의 거룩한 성전이 되는”(엡2:21) 목적을 실현한다. 성령은 이렇게 존 웨슬 리가 말한 대로 선제적인 은총과 더불어 지속적인 은총으로 그리고 종말론적인 은총으로 끊임없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모두에게 그 과정을 실현하신다. “주님은 곧 성령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얼굴의 너울을 벗어 버리고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비추어 줍니다. 동시에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옮아가고 있는’ 과정(프로세스)을 만드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다.         


필자가 회복적 서클이 지닌 ‘공동체의 자기-돌봄 프로세스’에 대한 영적 측면을 여기서 강조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당신이 기독 교사로서 하는 언어와 행위라는 윤리적 측면은 다음과 같은 공식을 갖는다. 당신이 행하는 것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에 의해 규정된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은 당신이 믿는 것에 의해 규정된다. 따라서 당신이 행하고 있는 회복적 생활교육과 당신이 믿고 있는 신념사이에 괴리가 있다면 힘을 받고 있지 못해 괴롭거나 힘이 소진되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렇게 되면 당신의 영혼과 역할사이에 분리가 일어나면서 가르침/배움은 즐겁지 않게 되고 도덕적 의무나 생존을 위한 필요의 일로 다가온다.


그러나 만일 당신의 신념과 당신이 행하고 있는 것 사이에 아무런 방해없이 일관성이 있게 되면 그대는 자신의 영혼의 내적인 목소리를 점점 뚜렷이 듣게 되고, 삶의 중심을 거센 폭풍우속에서도 가지게 되며, 그 일관성으로 인해 힘과 안전 그리고 풍요로움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교실은 더 이상 지옥이나 생존을 위한 일터가 아니라 경이로운 선물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안과 밖이 일치되면서 세상의 빛이 당신의 내면을 비추어 밝아지고, 또한 당신의 내면의 빛이 세상의 어둠에 비추어 길을 내게 될 것이다.  
       


결론을 대신한 질문들


회복적 생활교육은 결국 언어와 행위라는 윤리의 차원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영성적이고 존재론적인 기반에서 차이, 갈등, 손상의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할지 재-개념화하는 실천의 운동인 것이다. 그리고 앞서 설명하였듯이 이것은 전통적으로 어둠과 혼돈이라는 존재론적인 것에 대해 빛과 질서로의 전환에 대한 신의 창조적 섭리와 연결된 신앙과 인식의 연결점에 닿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이제 이해할 수 있다.


회복적 생활교육이 그러한 영성적이고 존재론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면 기독교육자로서 우리가 직면한 근본적인 과제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통해 찾아질 수 있다. 


- 우리는 어떻게 ‘진실과 은총어린 실재(리얼리티)’를 경험하고 자신은 내적 자유를 얻고 타자의 온전한 삶을 돕는 섬김의 능력을 행사하기 위해 ‘존재-인식-언어-행위’의 일관성을 가질 수 있는가?


- 회복적 실천이 리얼리티의 변형작업으로 볼 수 있다면  우리는 문제상황으로서 혼돈과 어둠(실패, 고통, 상처, 위기, 손상, 파괴)을 어떻게 빛을 통한 온전성과 풍성함으로 변형시키는 일이 내 소명이 될 수 있을 것인가?


- 어떻게 신의 주권(샬롬의 통치)이 이제는 성취, 환희, 일치의 복된 공간(교회, 기도시간)을 넘어 비통한 공간(좌절, 분노, 논쟁, 다툼)에서도 ‘생명을 주고 더욱 풍성케함’에로의 일관된, 그러면서도 저절로 우러나오되 계속해서 활력과 영광됨이 작동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


- 어떻게 우리는 배움의 공간(물리적 공간, 마음의 공간)에서 교사로서 나의 정체성, 상대방의 타자성 그리고 주제의 진리성이 상호소통되고 연결되는 리얼리티로 대화와 수업에서 일어나게 할 것인가?


이 질문들은 우리의 의식과 행위를 성찰하는 씨앗-질문들이자 장차 우리를 성장시킬 질문이며 지금의 한국의 교육현실에 대한 새로운 에너지와 실천으로서 새 패러다임을 가져올 질문들이다.
2016.4.23. (이 글은 최근에 원래 좋은교사운동의 잡지[5월호]에 실린 글을 잡지사의 한정된 지면 때문에 조금더 확대하여 쓴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