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기 -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저항의 문제'

평화숲 2014. 3. 13. 10:23

280쪽~

 

내 견해는 이렇다. 종교개혁자들이 내린 결론, 곧 전제 정치에 대한 적극적 저항이 허용될 뿐 아니라 의무적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입장이 분명 옳다고 생각한다. 때로 시민 불복종이 불가피하더라도 말이다. 단, 그들이 이런 결론을 내린 까닭은 다시 진술할 필요가 있지마나 말이다. 이제 오늘날의 논의는 그런 저항을 전개할 때 폭력이 윤리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지 여부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저항 운동의 폭력보다 정부가 휘두르는 폭력을 훨씬 더 너그럽게 보아 준다. 피로 얼룩진 금세기에 저항운동이 저지른 폭력과 정부가 휘두른 폭력을 비교해 보면 전자가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약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렇게 된 것은, 정부가 아무리 최악의 폭력을 뒤두르더라도 어쨌든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새악에 단호히 도전한다. 잔학하고 악명 높은 상처를 입히는 정부는 그 합법성을 상실한 것이고, 그런 정부의 관료들은 범죄를 저지른 민간인의 지위를 가질 뿐이라고 말이다. 이런 결론이 옳다면, 정부와 저항 운동 간의 적대 관계를 생각할 때 고려해야 할 핵심 사항은, 민간인 편에서 폭력에 대해 폭력으로 대응하는 일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만일 교회가 사회적 세계에 등을 돌리지 않고 그것을 개혁하는 일이 자기 소명임을 분명히 깨닫는다면, 그런 불의와 폭정과 권리 박탁에 대항하여 적극적으로 싸우는 기관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달리 희망을 찾을 수 없음은 분명하다. 노동자 계급이 그런 역할을 할 것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신념은 역사상 거대한 환상에 불과했음이 증명되었다. 일부 교회는 나치 독일에서 그랬던 것처럼 남미와 폴란드에서 이미 주요 저항세력이 되었다. 하지만, 그 교회의 행동은 단지 인간적 공감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사랑의 행동을 하도록 우리를 부르고 그런 행동이 결코 허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을 주는, 우리의 존재 바깥에서 오는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 그들은 또한 사람에게 용기를 주는, 우리의 존재 바깥에서 오는 능력으로부터 힘을 공급받는다. 그들은 민족들을 초월하는 한 공동체의 지원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대해 실망하기 쉽다. 샬롬이 충만한 하나님의 나라가 단지 교회 교인들이 하는 활동에만 달려 있다고 생각하지 말자. 그러나 교회가 오랜 암흑의 세월을 지나오면서, 그래도 새 날ㅇ르 가리키는 인상적인 표지이자 성례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하나 있다. 역사 속에서 늘 성격을 전하는 일꾼 역할을 해온 것이다. 그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나사렛 예수를 가리켜 보여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교회는 그 심부름꾼이 타락했을 때라도 그 말씀을 증언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자기도 놀랄 만큼의 저항과 소망의 씨앗을 심었다. 남아공화국의 흑인들 가운데, 남미의 농부들 가운데, 그 밖에 세계 곳곳에서 그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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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항의 세력이 누구여야 하는가.

 "노동자 계급이 그런 역할을 할 것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신념은 역사상 거대한 환상에 불과했음이 증명되었다. 일부 교회는 나치 독일에서 그랬던 것처럼 남미와 폴란드에서 이미 주요 저항 세력이 되었다."라는 월터스토프의 말에서, 교회가 저항세력이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들린다.

며칠 전 남편과 교회의 역할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나누었다. 지금 돌아보면, 결국 저항세력이 교회여야 하는가 하는 이야기였다.

결론적으로 나는 교회가 저항세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남편은 교회가 교회의 이름으로 저항세력이 되기보다는 기독교인들이 저항세력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얘기다.

남편과 나는 '교회'의 정의부터가 조금 달랐다.

교회는 교인들의 모임으로 본다면, 교회가 저항세력이 되어야 한다는 내 말에 동의할 수 있겠지만, 교회를 물리적, 행정적 기관으로 본다면 남편은 교회가 저항세력에 되어야 한다는 것에 다른 생각이다라는 것이다.

'저항'이 뭐냐도 문제겠다. 에궁... 얘기가 점점 근본적으로 빠져버리네.

너무 깊게 가지 않겠다.

 

 교회가 저항 세력이 되어야 하는가. 월터스토프는 교회의 역할에 대해 한 가지로 규정하지 않았다.

그는 역사적으로 교회가 저항 세력으로 역할을 했던 것을 떠올리게 했고, 그것이 교회의 역할로써 벗어나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는 마지막 문장에서 "역사 속에서 늘 성경을 전하는 일꾼 역할을 해왔다 ... 교회는 그 심부름꾼이 타락했을 때라도 그 말씀을 증언했다."라고 진술했다.

그 말속에서 나는 교회가 하나님말씀을 잘 연구하고 훈련하고 전하는 역할 역시 중요하다고 하는 것을 듣는다.

교회의 역할은 한 가지가 아니다. 그리고, 교회의 일을 단일한 모습으로 규정해서도 안된다.

이것은 옳다 저것은 틀리다 식으로 방법적인 것에 교회를 묶어 두어서도 안된다.

 

다시 현재로 돌아오자.

대량 빈곤의 시대, 가난이 개인의 문제라기 보다는 사회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강화되고 있다.

개인의 노력이나 선택을 무력화시키고 있고, 이익이 소수에게 집중되게 하는 시스템이 지금도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다 .

억압받고 핍박받는 사회에서 교회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성경을 연구하고 전하는 것도 중요하다. 왜냐면, 우리는 예수라는 나침반이 없다면, 우리 스스로가 타락하는 것을 막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불정의한 사회에 대해 침묵해서도 안된다. 저항해야 한다.

월터스토프의 말처럼 우리는 존재 바깥에서 오는 능력으로부터 힘을 공급받고 있고, 민족을 초월하는 공동체의 지원을 받는 존재가 아닌가.

누구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샬롬을 이루기 위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는다면, 직무유기이다.

지금은 교회가 사회의 부정의에 저항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