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숙영의 회복적 생활교육 이야기 30
굶주린 유령
굶주린 유령은 커다란 배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목이 바늘처럼 가느다란 커다란 배 말이다. 그들은 몹시 배가 고프고 뱃속이 텅텅 비었음에도 음식을 삼킬 수 없다. 그들은 사랑과 이해에 굶주려 있지만 사랑과 이해를 받아들이는 능력이 미미하다.
- 스캇 펙
혹성탈출의 코바.
얼마 전, 영화 ‘혹성탈출’을 보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영화의 배경은 인간의 탐욕으로 발생한 치명적인 바이러스로 인간의 세계가 파괴되고, 면역으로 살아남은 소수의 인간들만이 뿔뿔히 흩어져 살게 된 미래의 지구이다. 인류를 멸망에 이르게 한 바이러스는 오랫동안 질병해결을 위해 실험용 동물로 사용해왔던 유인원들에 의해 확대되었고, 약물로 인해 지능이 발달하게 된 유인원들은 더 이상 인간으로부터 학대받지 않기 위해 저항하고 싸워서 그들만의 공동체를 이루고 산다. 인간과 유인원의 전쟁은 소강상태가 되면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에서부터 영화는 시작된다. 그러나 전력을 필요로 하는 인간들이 유인원 주거지역 안에 있는 폐쇄된 발전기를 이용하기 위해 접근하면서 부터 그동안의 평화에 긴장감을 자극하게 된다. 이때 유인원인 시저와 코바는 인간의 접근에 대해 상반된 반응을 하게 되는데, 시저는 인간이 원하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도록 돕고 각자의 영역은 침범하지 않는 평화협정을 하려하고, 코바는 인간은 에너지를 얻게 되면 다시 전쟁을 일으키게 될 것이기 때문에 발전기를 수리해서는 안 되고 인간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우두머리였던 시저의 의지대로 기술자인 인간 말콤이 발전기만 수리하면 바로 돌아가기로 약속한 뒤, 수리할 수 있도록 한다. 이를 불만의 눈초리로 보고 있던 코보가 결국 인간의 지역에 들어가서 무기를 빼앗아 시저를 배반하고 유인원들을 선동해 인간세계를 무참하게 공격하고 인간들을 철장에 가둔다.
우리는 경험적 존재이다.
코바가 등장하기 전까지 인간과 유인원 사이에 평화협정의 가능성이 열리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해결되지 않은 채, 증오와 분노가 가득했던 코바의 돌발적인 행동은 결과적으로 인간과 유인원을 다시 끔찍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한다. 코바만 아니었다면, 인류는 과거에는 원수였던 인간과 유인원 사이에 평화와 협력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을 텐데, 코바로 인해 한순간에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다. 코바만 없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코바는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코바는 인간으로부터 받은 학대로 인해 해결되지 않는 상처가 있었다. 그래서 인간을 향한 증오심이 무의식속에 깔려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동일하게 인간으로부터 학대받는 시저는 어떻게 코바와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 영화상에서 보면 시저는 인간과의 우정과 사랑을 경험한 기억이 있다. 인간으로부터 따뜻한 돌봄을 받은 기억은 시저가 폭력적인 순간에서도 평화를 선택할 수 있는 힘을 준 듯 했다. 하지만 코바의 인생에서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경험한 적이 없다. 인간에 대한 강렬한 적 이미지는 코바로 하여금 인간에 대한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우리는 경험 속에서 사는 존재이다. 선지자적 예지력이 없다면, 우리는 다만 경험 속에서 터득한 대로 살 수 밖에 없는 제한적 존재이다. 코바가 만약 인간으로부터 한번이라도 신뢰와 우정을 경험한 적이 있다면 어떠했을까? 인류에 다시 전쟁의 불씨를 당기는 일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우리 시대의 굶주린 유령
코바가 인간으로부터 신뢰와 우정을 경험했다면 다른 결과가 있었을까? 우리 인생은 생각보다 복잡해서, 이미 훼손된 신뢰와 우정을 회복하고 치유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인간이 어느 정도로 신뢰와 우정을 베풀어야 코바의 상처가 치유되고 함께 협력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었을까? 스캇 펙 박사의 비유에 비추어 보면, 코바는 인간이 만들어낸 굶주린 유령과 같다. 굶주린 유령은 특히 가족과 부모, 선생님과 사회로부터 이해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선한 것, 아름다운 것, 참된 것을 보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 굶주린 유령들은 어슬렁거리면서 우리를 찾아온다. 그들은 뿌리가 없는 나무 같아서 자신에게 필요한 양분을 쉽게 흡수하지 못한다. 굶주린 유령은 배가 고프고 뱃속이 텅텅 비었음에도 불구하고 음식을 삼킬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랑과 이해에 굶주려 있지만 사랑과 이해를 받아들이는 능력이 미미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에 코바와 같이 굶주린 유령은 누구인가?
얼마 전 나는 자전거를 훔치고 시장을 돌아다니며 18군데 점포에서 절도 행각을 한 다섯 명의 중학생들을 만난 적이 있다. 한 명 한명 만나서 대화를 했는데 아이들은 너무나 평범하고 단순했다. 그저 친구들과 놀다가 절단기가지고 자전거 훔쳐서 타다 버리고, 담배와 음료수, 이어폰 등을 훔친 것이다. 아이들은 후회된다고 말했지만 그 말이 너무 담담하게 들려왔다. 아이들의 가정사와 일상을 듣다보니 마음이 답답하다. 어머니와 연락이 끊긴 아이, 아버지의 완력과 권위에 반항하는 아이, 아이를 잡아주지 못하는 부모의 나약함, 경제적으로 불평등함이 느껴지는 환경 등등…. 아이들의 가정사와 개인적 삶 속에는 무기력과 무관심이 묻어 나왔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을 처벌을 통해서 억지로 바꾸기보다는 회복적 접근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학교의 노력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그리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교사들은 그 아이들이 교실로 돌아오면 자숙하지 않고 전 보다 더 위세가 등등해진 것 같다고 걱정했다. 경찰에서 수사를 받고 있는 과정인데도 교실에서 주변 친구들에게 요즘 손이 근질근질하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다섯 명 아이들의 그러한 행동이나 말이 학급과 학교에 끼치는 영향은 적지 않았다. 좁은 교실 공간에 불신과 폭력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학급의 평화와 안전뿐만 아니라 학교 전체의 질서와 평화까지 위협하고 있었다. 학급 안에서 보이지 않는 불안을 날마다 마주해야 하는 담임교사의 스트레스는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 아이들만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불안을 퍼트리고 평화를 깨는 일들은 막을 수 있을 텐데…. 그들은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그들의 돌발적인 한 순간의 선택은 전체 공동체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렸다. 그 이후에도 아이들은 회복적 접근을 하려는 학교의 배려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조금만 마음을 고쳐먹고 노력해도 자신들과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될 텐데 말이다.
더 많은 인내가 필요하다.
그들의 삶은 왜 그렇게 비틀어져 있을까? 아이들의 비틀어진 삶에 우리의 책임은 없는가? 우리 사회가, 내가 만들어 낸 무관심과 불신이 그 아이들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닌가?
우리 사회의 여기저기에는 우리가 만든 굶주린 유령들이 너무나 많다. 최근 사회적으로 심화되는 경제적 불안과 정치적 불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불안과 무기력, 공허한 마음을 갖게 하고, 이러한 공허함과 불안은 다시 사회를 경직되게 하고 불안전하게 한다. 이러한 악순환들로 인해 앞으로 굶주린 유령들은 더 많아질 것이다. 그들은 사랑과 신뢰에 굶주려 있지만 먹을 수 없고 소화할 수 없기 때문에, 누군가 잠깐 베푼 사랑과 관심으로는 굶주린 배를 채울 수가 없다. 다섯 명의 어린 학생들은 우리의 현재 모습이다. 상처받고 치유되지 못한 영혼들이 이 사회에 다시 어두움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격리나 배척은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 그들에게 따뜻한 빛을 쪼이도록 하여 시들은 마음의 힘을 회복하게 해야 한다. 그것만이 유일한 처방이다. 그런데, 따뜻한 빛을 오래 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동안 마음이 오랫동안 너무 어둡고 차갑게 얼어 있었기 때문에 많은 빛을 오래도록 필요로 한다. 잠깐의 친절과 사랑은 오히려 불신만 쌓을 수 있다.
언제 어느 때보다도 우리 사회는 어두움을 벗어나기 위해 오랜 인내와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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